묘소(화보)
 

17세 남계공 휘 희무 묘소

ㅡ 경남 함양군 유림면 대궁리 재궁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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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북정(望北亭) ⊙


*17世 남계공(濫溪公) 휘(諱) 희무(希茂) 유적*
벼슬에 물러나 초야에 있지만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변함없는 충성심을...
ㅡ 경남 함양군 수동면 서평 연화산 중턱 ㅡ



16世 참봉공(參奉公) 휘(諱) 각(珏)의 아들.
*자(字) 언실(彦實). 호(號) 남계(濫溪).
1527(중종 丁亥) 8.21生 ~ 1637(丁丑) 9. 3卒.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하수업(門下受業).
*관(官) 명종(戊午1558) 세자별시 병과(世子別試 丙科) 급제.
삼사관(三司官), 오읍수재(五邑守宰)ㅡ좌승지(左承旨), 우승지(右承旨)에 올랐고,
외직으로는 순창, 금산, 밀양, 울산부사와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역임.
경남 함양군 수동면 화산서원에 배향.

▼ 망북대(望北臺) ▼
17世 남계공(濫溪公) 휘(諱) 희무(希茂) 유적*
ㅡ 경남 함양군 수동면 서평 ㅡ


◆망북대(望北臺)와 망북정(望北亭)의 내력◆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서평 연화산 중턱에 조그마한 정자가 바로 망북정(望北亭)이었다. 망북이란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남계의 후손들이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최근에 중수한 건물로 고색창연한 멋은 없었으나 단아한 풍치를 느끼게한다. 망북정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400여년전, 조정에서 승지(承旨) 등의 벼슬을 지내다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온 남계공은 매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中陽節)이 되면 두 동생(택민, 일민)을 데리고 마을 뒷산에 올라 대궐을 바라보면서 해가 지면 내려오곤 하였다. 비록 몸은 초야에 있지만 임금을 그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벼슬길에 나가서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을 다하는 것이 당시 최고의 덕목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남계공의 충성심은 후인들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남계공의 충성심을 기려 그 땅을 "망북대(望北臺)"라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이 땅에다 남계공의 정신을 기려 정자를 세웠으니 곧 지금의 "망북정(望北亭")이 생기게 된 내력이다.

▼ 남계공(濫溪) 임희무(林希茂)ㅡ성씨올림픽 전시용 판넬▼
 

*남계(濫溪) 임희무(林希茂)는 1527년 함양군 동쪽 서평촌(黍坪村·현재 수동면 원평리 서평)에서 태어났다.

자는 언실(彦實)이다. 아버지는 참봉 각(珏)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는 시민(時敏)의 딸로 시민은 산청 선비 안분당(安分堂) 권규(權逵)의 백부이다. 남계 어머니 권씨는 함양의 대표적 인물인 옥계 노진의 모친과 자매간으로 남계와 옥계는 이종사촌간이 된다.
어려서 영특하여 부친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드시 우리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였으며, 부친에게서 글을 배웠던 남계는 당시 함양에서 많은 선비들을 가르친 당곡 정희보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명성은 인근에 자자하게 되고, 23세때 감악산으로 놀러 온 남명을 만나게 된다. 1549년 팔월 초순이었다. 감악산은 소백산맥에서 뻗어나온 가야산지의 준봉으로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의 경계를 이룬 산으로 해발은 951m이다.

1549년 명종 4년 8월 남명 조식 선생이 거창 감악산에 와서 포연대(거창군 신원면 구사리)에 유람하고 있었고, 이때 남명 문인 남계 임희무(林希茂)와 박승원(朴承元)이 함께 찾아가 산수를 완상하고 이들은 포연에서 함께 목욕을 하면서 놀았는데, <욕천(浴川) :'냇가에 목욕하고서'>이라는 시를 지었고 《남명집》에 전한다.

全身四十年前累 사십년 동안 더렵혀진 온 몸 /
전신사십연전루
千斛淸淵洗盡休 천 섬되는 맑은 못에 씻어버리리 /
천곡청연세진휴
塵土당能生五內 만약 티끌이 오장 안에 생긴다면 /
진토당능생오내
直今과腹復歸流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직금과복부귀류

세상의 티끌을 맑은 못에 씻어 보내려는 선비들의 맑은 기개가 엿보이는 시다. 남계공도 같은 생각을 가졌으리라.
포연은 지금 거창군 신원면 구사마을에 있다.
26세때 개암 강익을 비롯한 이 지역 선비들과 일두 정여창을 모실 남계서원을 창립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32세때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해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예를 다하여 부친상을 마치고 이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성균관 학유, 홍문관 정자, 사헌부 지평, 정언, 장령 등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금산.순창.밀양.능주.울산군수 등을 두루 지냈다.
능주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남명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옥계 노진, 청련 이후백,개암 강익,덕계 오건등과 학문을 연마하였던 것이다.

40세되던 해 봄 남명선생을 모시고 옥계 개암 동강 등과 산청 지곡사에 모여 여러날동안 자연을 완상하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왔다. 이때 모임을 남명선생 편년에 "초 십일에 선생께서 지곡사에 이르니 덕계가 노공을 맞이하여 와서 뵈었다. 이튿날 강개암 김동강 정매촌 도양성 정역양 임남계 노사암이 잇달아 이르렀다. 멀고 가까이 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서 여러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인근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인 자리에 남계도 참석한 것이다. 이해 남명선생의 안의 화림동 유람에 같이 가서 동료들과 산수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남계는 낙향 후 현재 망북정 자리에 오두막집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들을 지도 하면서 항상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잊지 않았지만 다시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쪽땅에서 1577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후 갈천 임훈을 비롯한 인근의 많은 선비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특히 이종형인 옥계는 제문에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뒷일을 수습할 사람은 그대이고 내가 죽으면 뒷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 그대밖에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나보다 먼저 죽어 나로 하여금 살아서 의지할 때 없이 만들고, 죽어서 부탁할 곳 없이 이 세상에 외롭게 살아가게 만들었는가"라고 하여 남계의 죽음에 눈물을 뿌리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지금은 남계가 남긴 흔적 또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살아생전 남겼을 법한 많은 글들은 그동안 겪은 난리들로 인해 없어지고, 다만 여러 친한 벗들의 문집에 남아있는 기록들을 모아 엮은 한 권의 문집이 전한다. 그나마 문집에 실린 글 역시 부실하기 이를데 없어 시 20여수, 행장 1마리가 모두이다. 남명선생을 비롯하여 당대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며 주고 받았던 글들이 작은 분량이 아닐것인데 지금 전해지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11世 도정공 유소(有巢)

12世 *교수공 상재(尙榟). 집의공 상기(尙杞), 생원공 상지(尙智)

13世 전성, *생원공 유성(由性), 대호군공(大護軍公) 치성(致性)

14世 훈도공(訓導公) 석동(碩仝)

15世 생원공(生員公) 헌(憲)

16世 참봉공(參奉公) 각(珏)
l★
17世 남계공(濫溪公) 희무(希務), 희수, 통덕랑공 희영

 
16세 찰방공 휘 문한 묘소ㅡ경남 산청군 산청읍 차탄리ㅡ
17세 통정대부 휘 응벽 묘소ㅡ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고읍 ..
17세 휘 응익 묘소ㅡ경남 함양군 유림면 화촌리 열음계
17세 휘 자진 묘소ㅡ경남 산청군(읍) 차황면 양곡리 대산동
17세 남계공 휘 희무 묘소ㅡ경남 함양군 유림면 대궁리 재궁
17세 통덕랑공 휘 희영 묘소ㅡ경남 함양군 유림면 대궁리 재궁..
17세 휘 자무 묘소ㅡ경남 산청군 산청읍 운곡리 매봉
17세 진사공 휘 자화 묘소ㅡ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금계
17세 우찬성공 휘 우춘 묘소ㅡ경북 영일군 리ㅡ
17세 은암공 휘 경춘 묘소ㅡ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17세 성재공 휘 대춘 묘소ㅡ경남 진주시 장재동 천곡 수박등ㅡ
17세 담담재공 휘 수춘 묘소ㅡ전남 나주시 노안면 유곡리 산168
17세 현감공 휘 세언 묘소ㅡ경남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ㅡ
18세 참봉공 휘 춘수 묘소 ㅡ 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성내(..
18세 수강공 휘 춘계 묘소ㅡ경남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성내ㅡ
18세 휘 팔급 묘소ㅡ경남 함양군 유림면 화촌리 회동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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