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화보)
 

 17世 백호공 휘(諱) 제(悌) 묘소
ㅡ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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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백호공 휘 제(悌) 묘소⊙


禮曺正朗知製敎白湖林公之墓(예조정랑지제교백호임공지묘)
淑人慶州金氏 (숙인경주김씨 부)



ㅡ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ㅡ

♣자(字) : 호(號) : 백호(白湖)
♣ ~
♣관(官) :
♣묘소(墓所) :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실(室) : 숙인 경주김씨
♣제실(祭閣) : 영성각
♣시제일(時祭日) : 음력 10월 22일 시향(時享)
☎연락처 : 임종성(대종중도유사) 061ㅡ454ㅡ6809, 011ㅡ9229ㅡ7090. 중앙화수회02ㅡ738-5724
..임채하(홈피관리자) 011ㅡ609ㅡ6122, 임점택(다음카페운영자) 016ㅡ869ㅡ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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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世 감무공 탁(卓)

10世 소윤공 봉(鳳)

11世 산원공 시소(始巢)ㅡ도정공 유소(有巢)ㅡ주서공 수소(遂巢)
(散員公) (都正公) (注書公)

12世 시정공 석주(碩柱)

13世 참의공 귀연(貴椽)ㅡ진사공 귀량(貴樑)

14世 참판공(參判公) 평(枰)

15世 귀래정공 붕(鵬)ㅡ생원공 학(鶴)ㅡ동지공 안(鷃)
(歸來亭公) (生員公) (同知公)

16世 장수공 익(益)ㅡ정자공 복(復)ㅡ 절도공 진(晉)ㅡ첨지공 몽(蒙)
(長水公) (正字公) (節度公) (僉知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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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①제(悌)ㅡ②선(愃)ㅡ③순(恂)ㅡ④환(懽)ㅡ⑤탁(㤞)
백호공 백화정공 강계공 습정공 창랑정공

▼ ㅇㅇㅇㅇㅇ ㅡ영모정 앞


▼ ㅇㅇㅇㅇ




♣ 백호공(白湖公) 휘(諱) 제(悌) 사적

공의 휘(諱)는 제(悌)요 자(字)는 자순(子順)이니 호(號)는 백호(白湖) 또는 풍강(楓江) 겸제(謙齊) 소치(嘯癡)이시다. 절도공(節度公)의 아들님으로 明宗己酉 1549년 12월 20일에 낳으시고 선조(宣祖) 병자(丙子 一五七六年)에 생진(生進) 양시에 올라 정축(丁丑 1577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셔 옥당(玉堂)을 역임하시니 관은 흥양현감(興陽縣監) 예조정랑(禮曹正郞)이시다. 정해(丁亥) 1587년 8월 11일에 졸하시다. 공(公)이 임종시에 가이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이팔만(四夷八戀)이 다 제국(帝國)이라고 칭하는데 홀로 우리 조선(朝鮮)만은 중국(中國)에 속국이 되었으니 내가 살아서 무슨 일을 할 것이며 내가 죽는다 해서 무슨 한 됨이 있으리요 하시었다. 문집(文集) 2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일적(逸蹟)
공(公)은 탁락한 기절이 있으셔 젊어서 호협을 좋아하시고 더욱이 병법을 좋아하시었다. 일찍이 한번 성대곡(成大谷)을 뵙고 흡연히 스승을 삼으시니 이로부터 글 읽기로 결심을 하여 의마적(意馬賊)을 지어 공의 뉘우치심을 기록하셨다.
하늘에서 타고 나신 바탕이 높아 도학(道學)의 큰 뜻을 깨달으시고 그 시문(詩文)에 있어서는 대개 천기(天機)에서 나와 그 성운(聲韻)과 색택(色澤)이 자연하고 호매하여 유려(流麗)하여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이 항상 자순(子順)의 시(詩)는 두목지(杜牧之)의 시같다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공을 알아준 말이라 하겠도다.
공이 일등(一等)으로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二등으로 생원(生員)에 올라 문과 을과(乙科)로 수장원이 되셨다. 공이 장차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재직중의 아버지 절도공(節度公)을 뵈이려 가시매 먼저 발정할 일자(日字)를 통고할제 그날 큰 바람이 일어나니 목사공(牧使公)이 각처 사공들에게 분부하여 말씀하시기를 육지 배가 반드시 표풍의 환이 있을 터이니 모름지기 예비를 하라고 명하시니 관리들이 다 말하기를 이같은 날에 어찌 발정을 할 수가 있으리요 하더라. 목사공(牧使公)이 왈 아들을 아는 것은 애비 같음이 없다 하시고 그대로 분부를 하였더니 이윽고 공이 제주(濟州)에 오셔서 근성(覲省)을 하니, 목사공(牧使公)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날에 어찌 발선을 하였던고 하고 물으시니 공이 대답하시기를 사공들도 역시 발선함을 즐거워하지 안하였으나 소자가 이 풍랑의 장관을 보고저 함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공이 일찍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가 三年동안 중용(中庸)을 읽고 산에서 나오니 그때 만산수엽(滿山樹葉)이 다 중용(中庸)글자를 이룬듯하였다. 한귀 글을 지으시니 왈, 도(道)가 사람을 멀리함이 아니라 사람이 도(道)를 멀리함이요 산이 속세를 떠남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나는도다 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거기서 사는 중이 임공독서암(林公讀書菴)이라고 한다.
공이 사우(士友)들로 더불어 일찍이 영남에서 놀으실제 한 촌가를 지내니 그집에서 바야흐로 잔치가 벌어져 빈객이 만좌하였다. 공이 동반한 벗을 밖에 두고 먼저 들어가며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그대들을 부를 터이니 좀 기다리라 하고 공이 들어 가시다. 그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남을 보고 공이 성명을 통하지 않고 마구대고 그 자리에 앉으니 좌중이 서로 돌아보고 웃거늘 공이 말씀하시기를 문밖에 더 웃기는 사람이 있다 하니 좌중이 인하야 가서 맞아와 통성을 하니 이에 백호선생(白湖先生)이었다. 드디어 종일 즐기고 파하였다.
공이 속리산에서 글을 읽으실 때 충청감사(忠淸監司)의 아들이 산에 놀러오매 공이 아이중으로 하여금 푸른 옷을 입히고 공은 상봉에서 옥 통소를 불으시며 또 절중에게 여차여차 하라고 약속을 하였다. 감사의 아들이 통소 소리를 듣고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중이 꿇어앉자 대답하기를 이 산에는 예로부터 신선이 노는 곳이 있어 이따금 신선의 음악소리가 들리는데 산간에서 들리기는 하여도 찾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소리나는 곳을 찾어 정상에까지 오르니 멀리 두 늙은이가 바둑을 두고 있고 그 옆에는 청의동자가 모시고 있음을 보았다. 손이 옴을 보고 청의동자가 서서히 말하기를 속객이 온다고 전하매 동자를 명하여 신선의 술을 보내며 마시라 하니 그 술맛이 말오줌같아서 그 맛이 추악하여 참지 못하겠으나 억지로 그 술을 마시더라. 인하여 한 절구 시(詩)를 주니 그 시에 왈 붉은 띠를 뛴 아름다운 소년이여 진세간에서 기특한 남아로다 한병 술로 서로 전송을 하여 파하니 속리산 구름이 말리로다 라고 하였더라. 공이 일찍이 대곡선생(大谷先生)을 좇아 글을 배움에 선생이 애중히 여겨 하늘 가운데의 달로써 공의 기상을 비하였더라. 대개 젊어서부터 강개한 뜻이 있어 한 세상을 거만하게보고 대곡선생을 얻어 스승으로 삼어 경서(經書)를 연구하는데에 마음을 결정하였더니 대곡선생이 몰하신 후로부터 세상에 지기(知己)가 없다고 하시며 세속을 따라 저앙함을 즐기지 이니 하시고 스스로 자기를 숨기셨다.
박선생(朴先生) 팽년실기(彭年實記)에 왈 선조(宣祖) 선비 三人이 망혜(芒鞋)로써 호남(湖南) 호서(湖西)로부터 와서 박선생(朴先生) 사당(祠堂)에 배알하고가니 그중 한사람은 용모가 고박하여 그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중 또 한사람은 충청도(忠淸道) 조중봉(趙重峰) 헌(憲)이요 또 한사람은 전라도(全羅道) 임제(林悌)로 호(號)는 겸제(謙齊)라고 기록되어있다. 단종실기(端宗實記)에 왈 임제가 일찍이 수성지(愁城誌)를 저술하였으니 그 글에 왈 글자 한자에 눈물 한방울씩 들었으니 그 예를 들어보면 무고문중(無辜門中)에 슬프고 슬프고 괴롭고 괴롭고 차마 말 못하고 차마 말 못할 것은 제왕(齊王)이 송백간(松柏間)에서 죽고 초(楚)나라 임금이 강중에 죽었다하는 대목이다.
공이 일찍 영남을 유람하실새 그 때에 로상 산중턱에서 사람들이 화전놀이차 모였는데 공이 그곳을 당도하여 말을 나무밑에 매어두고 자기 본색을 감추어 과객행세를 하시며 무턱대고 좌중에 들어가 인하야 요기하기를 청하니 그 사람들의 기색이 심히 냉하여 일제히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화전을 하며 상춘을 하고 있은 즉 만약 글을 못 지으면 음식을 먹지 못할것이니 손은 능히 시를 지을수 있는가 만일 시를 짓지 못하면 이 약속을 피치 못할것이로다 하더라. 좌중 사람들이 방금 글을 지으려고 괴로운 표정인데 공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시 문자를 알지 못하니 혹 가이 육담으로 대신할터이니 그대로 보아줄수 있는가 하니 좌중이 웃으면서 무방타고 하더라. 즉시 눈에 띠인바로서 말씀하시기를 적은 시내가에다 돌을 고여놓고 솥으로 관을 씌우고 흰 가루와 맑은 기름으로 두건화를 지진다 쌍 저금으로 그를 끓여 먹으니 입안에 향기가 가득하고 一年 봄 빛이 배속에 전하는도다 라고 부르시더라. 그 어구를 따라 글자를 찾어 글귀를 이루워보니 정관택석소계변(鼎冠擇石小溪邊) 백분청유저두견(白紛靑油煮杜鵑) 쌍저인래향만구(雙箸引來香滿口) 일년춘색복중전(一年春色腹中傳) 이런 글이 되더라. 좌중이 실색하고 사람들이 다 글을 짓지 못하더라. 공이 무식함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힐난히 물어 백호선생임을 알고 드디어 자리를 비어주고 맞아드려 종일토록 즐거히 놀으셨다고 한다. 제호시화(霽湖詩話)에 왈 임정랑(林正郞)이 시를 지음에 번천(樊川) 이손곡(李蓀谷)이 능수라고 지목을 하였다 하고 성대곡(成大谷)이 그 시를 보고 공을 한번 만나 보기를 원하였더니 백호께서 가서 선생을 뵈오니 서로 기뻐하시더라. 
계미(癸未) 갑신년(甲申年)간에 우계선생(牛溪先生)이 전조아판(詮曹亞判)이 되어 공의 포재를 꺾어 보려고 그 성씨의 내력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二三代 겨우 과명(科名)에 올라 세업이 얼마 되지 아니한다고 하시니 성우계(成牛溪)가 공의 속(俗)에서 벗어난 기상을 크게 칭찬하더라. 드디어 홍문관(弘文 )에 참여하고 얼마 안되어 병에 들어 졸하시니 그 시를 지으시매 절대로 궁한 태도가 없으셨으나 마침내 떨치지 못하였으니 가이 괴이한 일이라고 하겠다. 공의 향년이 三十九이시니 말년에 세상을 도외시하고 숨어 살으시니 사환에 뜻이 없어 취한뒤에는 문득 랑음고가하시고 노래한 뒤에는 옥 통소를 불으시며 가야금을 타셨으니 공의 높은 사적을 다 기록할 수 없도다.
공의 저술로 수성지(愁城誌)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남명소승(南溟小乘) 또 관성여사(管城旅史) 화사(花史) 등이 있다. 공의 시조로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참비 마졌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청조 욱어진 고세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은 어디에 두고 백골만 묻쳤난다
술부어 권하리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