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화보)

16世 정자공 휘(諱) 복(復)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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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정자공 휘(諱) 복(復) 묘소⊙

    贈貞夫人南平徐氏雙墳(증정부인남평서씨쌍분)
    贈兵曹判書(병조판서)
    承文院正字林公復之墓(승문원정자임공복지묘)



?묘갈확인중 ㅡ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ㅡ

♣자(字) : 희겸인希仁) 호(號) : 풍암(楓巖)
♣1521(중종 辛巳) 4. 27生 ~ 1576(丙子) 4. 18卒
♣관(官) : 1540(庚子) 사마시(司馬試) 진사.
..1546년 증광 을과(增廣乙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 등용.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사건에 연루 되여 삭주(朔州)에 유배.
1551년 순회세자(順懷世子)의 탄생으로 특사로 풀려남.
선조(宣祖)초에 박사(博士)에 임명 되였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공은 시문(詩文)과 학행(學行)뿐만 아니라 무략(武略)에도 뛰어났다. 1574년에 왜(倭)가 쟁단(爭端)을 만들자 변사(邊事) 십여책(十餘策)을 상소(上疏)하니 상(上)께서 비답(批答)을 내려 그중 전선(戰船 鐵甲船)의 제도(制度)를 가납(嘉納) 비변사령(備邊司令)과 각도수사(各道水使)로 하여금 그 설계에 따라 장조(裝造)하여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을 장려하였다. 과연 10여 년 후 1592년 임진년에 난이 일어나 통제사 이순신(統制使 李舜臣)등이 이것을 이용하여 대승(大勝)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묘소(墓所) :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삼실(三室) : 증정부인(贈貞夫) 남평서씨(南平徐氏) 雙墳
♣제실(祭閣) : 영성각
♣시제일(時祭日) : 음력 10월 18일 시향(時享)
☎연락처 : 임종성(대종중도유사)061ㅡ454ㅡ6809, 011ㅡ9229ㅡ7090. 중앙화수회02ㅡ738-5724
..임채하(홈피관리자) 011ㅡ609ㅡ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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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世 감무공 탁(卓)

10世 소윤공 봉(鳳)

11世 산원공 시소(始巢)ㅡ도정공 유소(有巢)ㅡ주서공 수소(遂巢)
(散員公) (都正公) (注書公)

12世 시정공 석주(碩柱)

13世 참의공 귀연(貴椽)ㅡ진사공 귀량(貴樑)

14世 참판공(參判公) 평(枰)

15世 귀래정공 붕(鵬)ㅡ생원공 학(鶴)ㅡ동지공 안(鷃)
(歸來亭公) (生員公) (同知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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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장수공 익(益)ㅡ★정자공 복(復)ㅡ절도공 진(晉)ㅡ첨지공 몽(蒙)
(長水公) (正字公) (節度公) (僉知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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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①서(惰)ㅡ②협(悏)ㅡ③계(悈)ㅡ④오(懊)
석촌공 유호공 첨추공 주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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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공(正字公) 휘(諱) 복(復) 행장(行狀)

公의 諱는 復이며 字는 希仁이고 號는 楓嚴이니 羅州 會津縣 사람이다.
羅州林氏는 高麗朝로부터의 顯族이다. 判事宰寺事 庇가 直長 永拔을 낳았고 永拔이 精勇將軍 良幹을 낳았으며 良幹이 護軍 朴을 낳았고 朴이 中郞將 永文을 낳았고 永文이 保勝別將 敦世를 낳았으며 敦世가 判圖判書 秀를 낳았고 秀가 行護軍 宣을 낳았으며 宣이 卓을 낳았으니 南海監務라 卓이 鳳을 낳으니 軍器少尹이요 鳳이 始巢를 낳으니 贈通訓大夫 軍器寺正이다. 始巢가 碩柱를 낳으니 贈軍器寺正 務安敎導요 碩柱가 貴椽을 낳으니 贈通政大夫 호조참의요 貴椽이 諱 枰을 낳으니 贈嘉善大夫 병조참판행전라도병마우후이다. 枰이 鵬을 낳으니 中仁明 三王朝에 亘한 名臣이다. 일찍이 最高科試에서 拔擢되어 華職을 歷任했다. 우뚝이 솟은 長身의 키로 玉堂班列에서 뛰어나서 바라보는 사람마다 人物이 魁傑한 것을 알았으니 當時에 이르기를 文武가 兼全한 人材라고 하였다.

承政院左承旨로 出仕하여 慶州府尹과 湖南 湖西의 兵馬節度使에 除授되었고 位階가 二品秩이다. 그러므로 三世가 다 登貴한 것은 承旨公 때문이다. 咸豊君 李宗義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辛巳年(一五二一, 中宗十六年) 四月二十七日에 公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器量과 知慧가 非凡하여 鄕黨사람들이 異常하게 보았다. 十餘歲가 되었을 때 承旨公을 따라 北行하여 京師에서 學問을 닦으니 文義를 빨리 터득하였으며 詩文의 文采가 대단하였다. 十八歲에 監試 兩事에 及第하였으나 罷榜이 되었고 그 다음해에 다시 兩事에 及第하였다. 二十歲인 庚子年에는 進士試에 合格하고 二十六歲인 丙午年 봄에 別試文科乙科 第七人으로 登第하니 對策(發策에 대한 所見開陳)은 人口에 膾炙되었다. 承文院 副正字로 臨時 除授되었다가 實正字로 例遷되었다. 그때의 領相이 크게 登用하기로 별렀으나 公이 年少한 氣銳로 詩酒에 잠기고 自身의 防備가 소홀해서 當路한 奸人輩의 公을 미워하는 者가 드디어 流言으로 中傷하게 되어 平安都 朔州地方에 流配되었다가 三年뒤에 풀려서 田里에 돌아오니 公은 뜻이 隱遯에 있어 이후로는 世事에 뜻이 더욱 없었다.

會津은 榮山江下流에 位置하여 江山의 勝景이 湖右에서 第一이다. 承旨公이 南中을 往來하면서 終生의 計로 卜居한 곳이었다. 壬子年(一五五二, 明宗七年)에 上疏하여 辭職하니 朝廷이 그의 떠나는 것을 애석히 여기고 光州牧使를 特拜하여 그의 歸鄕길을 빛나게 하였다. 그 다음해에 承旨公이 官衙에서 下世하니 公이 아우 節度公과 함께 봉츤하고 歸葬하여 侍墓에 誠孝로 盡哀하되 한결같이 古禮를 尊用하였다. 期滿하여 脫喪을 하게되니 그 哀痛함이 父母를 잃고 庇護가 없는 乳兒의 달랠바가 없는 것과 같았다. 한채의 堂宇를 세워서 현판을 달고 永慕라 하니 終身토록의 哀感을 붙이기로 한 것이다. 居家에 法度가 있어서 內外가 整肅하고 祖上을 받드는데는 禮로서 하되 精誠과 敬虔함이 至極하였고 子與姪의 或 祭祀에 不參하는 事例가 있으면 痛烈히 訶責하였다. 몸가짐이 매우 嚴格해서 平居에도 반드시 恭己하여 妻妾이라도 일찍이 公의 怠慢한 것을 보지못하였다. 모든 內外姪兒들이 앞에 모이면 거의 二十餘人에 이르지만 오가는 말이 조용하고 비록 飮酒해서 醉氣가 거나해도 敢히 喧笑하고 禮道에 어긋남이 없었다. 節度公이 公보다 六歲밖에는 젊지 않고 官職 또 높아 責重하지만 公을 섬기기를 嚴父와 같이 하였다. 家勢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普通이지만 有無를 不問하고 給血하니 六親이 無間하고 貧窮한 親戚에게는 흔히 식량을 도왔으며 가난으로 結婚을 이루지 못하는 집에는 그 用需를 주어서 適時를 잃지 않게 하니 자연 惠澤이 鄕里에 遍及되어 物貨의 疏通되지 않음이 없었다. 公의 訃音이 전해지자 閭巷이 모두 눈물지으며「어진 어른이 가셨다」하고 嗟歎해마지 않았다. 居閑하여서는 子弟들을 敎誨하는 것으로 樂을 삼았으니 節度公의 아들 正郞 悌와 進士 선과 현령 한과 處士 탁이 或은 詩文으로 鳴世하고 或은 學行으로 發顯하니 이것이 다 公의 장액하여준 힘인 것이다.

丁卯年(一五六七·明宗二十二年)間에 上에서 서복의 特命이 내렸으나 또 論難者의 阻害하는 바가 되었다. 그럼에도 公은 一切 介意하지 않았으며 武略에 造詣가 더욱 깊어서 恒常 彊域이 허술한 것을 指摘하고 不意之患에 戒備하는 마음의 姿勢를 啓發하였다. 甲戌年(一五七四·宣祖七年)間에 島夷가 果是 爭端을 만들었으니 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公이 비록 江湖에 退臥하여 있었지만 하루도 君父를 잊은 바가 없었으며 上疏로 邊事의 十餘條를 獻策하였다. 上께서 批答을 내리셔서 그 中 戰船의 制度를 嘉納하시고 備邊司令과 各道水使들로 그 樣式에 따라 裝造하여 不時의 變에 對備할 것을 장려하셨다. 數十餘年이 經過하고 果然 壬辰(一五九二·宣祖二十五年)의 亂이 일어났으니 統制使 李舜臣等이 많이 이것을 利用하여 制勝을 하였다. 譬喩하자면 買誼가 諸侯王의 子弟들을 차례로 封地를 받게 할 것을 提請한 爾來 數世가 經過하다가 主父偃이 實行하니 漢나라가 드디어 安定된 것과 같다. 公이 適時에 登用케 되어 硏究해 둔 것을 펴내놓고 하였더라면 功業이 果然 世上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 것인가? 公은 世人에게 許容되지 않음을 自量하고 오직 登高望遠하는 興과 낚시하는 樂을 즐기며 늦게는 거문고의 몇 曲을 익혀서 시름과 때로 君父를 그리는 心懷를 달랬다. 退居 十餘年에 鄕人의 옳고 그른 것을 입에 담지 아니하니 遠近의 알고 모르는 사람의 구별이 없이 그의 巨人됨을 우러러 보았다. 德望있는 公卿大夫로 錦州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찾아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相國 朴淳과 提學 許曄과 判書 鄭宗榮이 다같이 聲聞이 그치지 않았다. 면앙거사 四宰 宋純과 烟波居士 僉知 朴漑가 서로 많이 찾아왔다. 한때 公의 永慕堂命題에 次韻한 詩文만도 數百首가 되었으니 觀察使 安玹이 남긴 詩에 가로되

「孝子의 堂宇 세운 이 자리
先君의 오르시던 望臺란다.
登臨은 觀賞이 아니라오
思慕하는 哀切 돌아갈 줄 모르고
구름가니 泰山 바라보이고
뜰엔 나무가지 바람이 분다.
한平生 無恨한 抱限은
哀境이라 가늠하기 어려워」

公이 五十줄에 追慕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한 것을 보고 읊었을 것이다. 左議政 金命元이 남긴 글귀에 가로되 「安樂持常有 浮名謝당來」라 하였으니 아마 公의 常道에 遵順하고 自足한 것을 읊었을 것이다. 壬子年間에 公이 한구루의 盤松을 永慕堂의 南에서 發見하니 둥그런 盤狀과 그 엮어짐이 足히 五·六十名을 그늘에 있게 할 수 있었다. 公이 그 아래 앉아서 茫然自失 한듯이 終日하곤 하였다. 晩年에 그 소나무를 因해서 精舍를 짓고 命名하기를 孤松이라 하니 朴觀察 民獻이 銘하여 가로되「萬松은 君子의 衆多함을 比함이요 孤松은 節操의 特立을 表함이니 孤松 孤松이여 사람이 아니면 뉘 能히 알아보겠느뇨」라 하였다. 朴觀察은 文章大家라 片言隻子에도 輕重을 가린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公이 비록 頹廢하고 있었으나 同流에게 推見되는 것은 이와 같았다. 公이 丙子年(一五七六·宣祖九年) 四月十八日에 正寢에서 別世하니 享年이 五十六歲였다. 金公 命元이 그때에 羅州牧使로 있었으니 訃音을 듣고 哭臨하여 初終을 護喪하였다.

이해 여름에 錦城山 南쪽 佳藏洞西의 乾坐巽向 언덕에 葬事를 지내니 先塋을 따라간 것이다. 公은 初娶 再娶가 다 無後한 채로 早世하고 三娶에 進士 徐說의 따님을 맞아서 二男을 낳으니 長男이 서이다. 庚寅年 司馬試에 及第하고 乙亥年에 庭試에 合格하여 銀臺의 春官 夏官의 郞을 歷任하고 時에 茂長縣監으로 除授되었다. 父君이 別世하였을 때 겨우 七歲였으니 科擧의 及第와 出仕를 公이 보지 못한 것에 恒常 痛恨이 맺힌다고 하였다. 前府使 林植의 女를 아내로 맞아 二男一女를 두었다. 次男은 협이니 前牧使 朴光玉의 女를 아내로 맞아서 二男을 두고 早逝하였다. 심업의 二男一女에서 長男이 동으로 前別坐 洪瑞翼의 女를 맞았으니 益聖君 聖民의 孫女다. 一女는 故兵曹佐郞 李慶流의 子 제에게 出稼하였으니 鵝川君 增의 孫女다. 次男은 土覃이니 어리고 협의 二男도 다 어리다. 아아! 公의 身長이 八尺이요 腰圍가 여러 둘레이며 儀貌가 매우 魁偉하고 德量이 넓고 깊어서 公을 아는 사람은 그의 中心을 恭敬하고 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外貌를 畏敬하였다.

하늘이 이것을 주는데는 이같이 풍성한데 또 吝嗇한 것은 이같이 苛酷하니 무슨 까닭인가? 한번 斥黜되었을 뿐 다시 回復하지 못하고 小人輩들은 朝廷에서 날뛰는데 슬프다! 이 또 運命이 아닌가. 비록 그렇다 하지만 公은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내가 罪도 없이 時代의 버림을 받았기에 이루지 못하였거늘 兒子는 반드시 이루게 되리라」하였다. 서가 長成하게 되면서 文行과 忠信이 그 家統을 이으니 諸老先生의 公을 아는 이들이 모두 이르기를「비록 老成人은 없어도 오히려 古法이 있더라」하였고 따라서 孫子들이 모두 우뚝 頭角을 나타냈다. 이것으로 보면 公의 말이 果然 증험이 있으니 林氏의 福이 아직도 無盡할 것이다. 沆은 서에게 異姓이지만 그 同類라 公의 世系과 行事를 仔詳히 듣고서 行狀이 없음을 어찌 잊을 손가? 그 偉大한 面貌를 채철하여 行狀을 엮고 有德君子의 叱正을 기다리노라.

睡隱 姜沆 撰 (수은 강항 찬)
*자료입력 2007.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