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화보)
 
 
 

14世 참판공 휘 평(枰) 비문(碑文)

나주임씨 최초의 실존의 글 -     금석문(金石文)
ㅡ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ㅡ

 

     


 

 


 참판공은 자(字) 균보(均甫), 세조 8년(1462년)에 태어나서 무관으로 진출하여 종3품직인 병마우후(兵馬虞侯)를 역임하고 중종 17년(1522)에 돌아가신 인물이다.

그 아드님인 귀래정공(歸來亭公)휘(諱)붕(鵬)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어 병조참판으로 추증을 받은 것이다. 부조묘 사당에 모셔져 있다. 이 비문은 참판공의 아드님인 귀래정공의 친구인 대제학 정제 신광한(1484-1555: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 자는 한지. 호는 낙봉.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이다)이 짓고 알성위 송인이 쓴 비문으로 나주임씨 최초의 금석문이며 역사적인 기록이다.


------------------참판공 묘지문(墓誌文) -------------------
兵馬虞侯, 兵曹參判 羅州林公 諱 枰之墓 墓誌文
병마우후, 병조참판 나주임공 휘 평지묘 묘지문

ㅡ 外五世孫 右議政許穆 撰
ㅡ 외5세손 우의정허목 찬
羅州之林見於譜諜者 自判司宰寺事庇
나주 임씨를 보첩에서 보면 판사재시사 庇(비)로 부터

其後有直長永拔 精勇將軍良幹 護軍朴 中郞將永文
그 후 직장 영발, 정용장군 양간, 호군 박, 중랑장 영문,

別將敦世, 版圖判書秀, 大護軍宣 海南監務卓, 軍器少尹鳳 保勝散員始巢,
별장 돈세, 판도판서 수, 대호군 선 해남감무 탁, 군기소윤 봉, 보승산원 시소라.

散員之後 有石柱貴椽 無官二世至.
산원(공) 이후 석주․귀연이 계셨고, 관직이 없는 것이 2세(대)에 이르렀다.

公諱枰字均甫, 明英宗皇帝天順六年
공의 휘는 평이요 자는 균보이니, 중국 명나라 영종황제 천순 6년,

* 天順이란 연호는 중국 명나라 英宗황제때 사용하던 연호인데,
갑술보 원문에는 睿宗皇帝로 표기되어 있어 본래 史料를 검토함이 타당할 것임. 즉 중국 명나라 영종8년 조선 세조때로 서기 1462년에 해당함.)

我惠莊王八年 壬午 公生. 未成童父母皆歿,
조선 혜장왕(세조) 8년(1462년) 임오년에 공이 나셨다. 공이 15세(成童)에 부모가 다 卒(졸)하시니

以善居喪鄕黨賢之.
거상(3년상)을 잘하여 향당에서 어질다 하였다.

旣長善騎射以武科
(공이) 이미 장성하여 (조선의 대표적인 무과의 무예인) 騎射(기사)로서 무과에 등과하여
初屬內禁衛, 以烈士不甚知名
처음에 내금위에 속하였으나, 열사로서는 이름이 重厚(중후)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四十一爲黔毛浦 水軍萬戶 得士卒心, 爲湖南兵馬虞侯
41세에 검모포진의 수군만호가 되고 군사의 마음(信任)을 얻어 호남 병마우후가 되니

主將知其賢軍中事 悉以咨之
주장(主將)이 그 군중일을 어질고 재치있게 처리함을 알고 다 자문하니

名譽始箸 秩滿爲虎賁衛司果
명예가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났다. (호남병마우후의 녹, 즉 맡은 바 관직이)만기가 되어 호분위 사과가 되었다.

嘗薦拔公慨然曰
일찍이 인재로 발탁되어 천거를 받았는데, 공이 슬퍼하며 말씀하시기를

早失父母 艱難成長 無所學業得 至三品官 年且五十亦足矣.
“조실부모하고 고생하며 성장하여 배운바가 없이 (무과에 등과하여) 3품관(병마우후)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또 50이니 또한 족하다“ 하셨다.

還鄕里不復求仕家居 祭祀必潔誠
고향에 돌아와서 다시 벼슬을 하시지 않고 집에서 거하시며, 제사시에는 반드시 청결하고 정성스레 드렸으며

與宗族必親睦, 平生善與人忠愛
종족(성과 본이 같은 겨레붙이)과는 더불어 반드시 친목하셨으며, 평생동안 사람과 더불어(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셨으며

尤盡心於孤獨無所告者, 六十一歿
더욱이 어리고 부모 없는 사람(孤),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獨), 찾을 곳이 없는 이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본연의 고유한 덕성을 드러 내시다가(盡心), 61세에 졸하셨다.

娶彦陽金氏, 高麗名臣 金就礪之後而四醞直長沃之女
언양 김씨를 배필로 삼았는데, 고려 명신 김취려의 후예로 사온서 직장 옥의 자식이었다.

亦以善行爲家法. 男鵬 當己卯士禍率太學生 守闕
또한 선량한 행실로 가법을 삼았다. 아들 붕은 기묘사화 때에 태학생을 거느리고 대궐을 지켰으며

爭死事在己卯黨籍. 後登第官至東都大尹
죽음으로서 싸웠으니 이 일이 기묘당적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동도대윤에 이르렀는데

追爵三世曾大父爲軍器寺正, 大父爲戶曹參議
삼대를 추작(죽은 뒤에 관위를 내림)하여 증대부는 군기시정(정3품)을 삼았으며, 대부는 호조참의(정3품)로 삼았다(추작하였다).

公以兵馬虞侯 爲兵曹參判 . 金氏爲貞夫人 有三男
공은 병마우후(종3품)로서 병조참판(종2품)에 추작(종3품→종2품)되셨다. (부인) 김씨는 정부인에 추작되셨는데, 3남을 두셨다.

曰益長水縣監, 曰復承文院 副正字,
장남은 익인데 장수(현재 전북 장수군)현감(종6품)이요, 차남은 복인데 승문원 부정자(정8품)요,

曰晉關西節度使. 子孫多聞人達者稱大族
삼남은 진인데 관서절도사였다. (공의) 자손들은 견문이 넓고(多聞) 입신출세(立身出世)하여 대족으로 칭하였다.

公之墓在羅州會津上, 亦子孫仍居 或曰會津之林
공의 묘는 나주 회진에 있는데, 또한 자손이 여전히 거하니 혹은 말하기를 회진 임씨라고 하였다.

ㅡ 外五世孫 右議政許穆 撰
ㅡ 외 5세손 우의정 허목 찬

※ 허목 [許穆, 1595 ~ 1682] : 본관 양천. 자 문보(文甫) ․화보(和甫). 호 미수(眉). 시호 문정(文正).현감 교(喬)의 아들이며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에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 ․내시교관 ․조지서별좌 ․공조좌랑 ․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1657년 공조정랑 ․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으며, 그곳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읍지를 편찬하였다.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