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화보)


 

나주임씨(羅州林氏) 부조묘(不祧廟)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36-1번지

참판공(參判公) 임평(林枰)의 신위를 모신 사당

 

부조묘(不祧廟)

공의 자(字) 균보(均甫)이시며 세조 8년(1462년)에 태어나서 무관으로 진출하여 종3품직인 병마우후(兵馬虞侯)를 역임하고 중종 17년(1522)에 돌아가신 분이시다.공의 아드님인 귀래정공(歸來亭公) 휘(諱) 붕(鵬)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어 병조참판으로 추증을 받은 것이다.
부조묘란 불천위(不遷位) 사당을 뜻한다.원래 돌아가신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묘(家廟:사당과 같은 말)를 설치하는데 5대가 되면 묘제(墓祭)로 바꾸게 된다. 그런데 공적이 크거나 도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영구히 신위를 모시는 관행이 있었다. 이를 부조묘라 하는 바 나라의 승인이 내려서 행하는 경우와 가문에서 특별히 정해 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 부조묘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조묘로 정한 것은 바로 귀래정공의 발의에 의해서다. "공(公)은 우리 가문으로 보면 공(功)이 조종(朝宗)을 빛내고 업(業)이 후손에 드리웠으니 마땅히 영세불천(永世不遷)의 주(主)로 삼아서 그 거룩한 업적을 길이 잊지 말도록 할 것이다."라고 귀래정공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고 장묘우문(藏廟宇文:사당에 보관한 글)을 지어 유훈 으로 남기셨다. 이 후로 자손들은 유훈을 지켜서 오늘에 이르도록 참판공의 기일(忌日)인 음력 12월 5일에 참판공의 배위(配位) 언양김씨(彦陽金氏)<1월 12일> 두분을 추모하기 위해 여기 모여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고 있다. 장묘우문이 작성된 연대는 명종 8년(1553)이고. 명종 20년(1565) 이 사당을 건립했던 바 효종 5년(1654)에 중수했으며, 1986년 지금의 규모로 확장 증건하였다.

-서기 2003년 6월-


 

갑술보 수권에서 옮긴글 ▣

이 사당은 나주 林氏의 성조(聖祖)이신 참판공 휘(諱) 평(枰)을 뫼신 유일한 부조묘(不調廟)이다.

公은 서기 一四六二년 세조 八년 나림(羅林) 十四世로 회진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가묘(家廟)를 세워 추원지례(追遠之禮)를 극진히 하시던 중, 무과(武科)에 올라 一五0二년 연산군 八년 四十一세에 검모진만호(黔毛鎭萬戶)에 이어 一五0五년 전라도 병마후우(兵馬虞侯) 종三品직을 거쳐 一五0八년 중종 三년 四十七世에 귀향하여 一五二二년 六十세로 생을 마치시니 증 병조 참판이시고 음력 十二월 五일과 정월 十二일에 공과 비(妃)의 제를 여기에서 뫼신다.

본 묘우의 연혁은 一五六五년 명종 二十년에 건립하여 一六五四년에 근내외 자손들이 합심하여 각자 쌀과 목화를 희사하고 힘써 일하여 개축하였다는 휘 한(瀚) 20世 종손의 상량문이 전하며 一九八四년에는 二十八世 광행(廣幸)보해양조 회장의 헌성과 三十一世 도편수(都邊首) 채점(采点)의 감동(監董)으로 광할하고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으니 三十世 三澤은 상량문에 "낏친 터전에 산하의 영기(靈氣) 쌓아 있고 상서로운 구름은 묘우 정원에 머물어 있네 오직 선업(先業)을 숭봉하니 옛들보 문미(門楣)위에 보존했네 규모는 광활하나 좌향은 갑좌경향(甲坐庚向) 옛 같도다. 동쪽에 밝아 오르는 달이요 서쪽에 빛난 삼태성일세 두루담장 단장하니 묘우 모습 엄숙하오"라 하였다.

이와 같은 부조묘사당이 건립 유지하고 있음은 十五世 휘 붕(鵬) 호(號) 귀래정(歸來亭) (一四八六년생 一五五三년 졸)께서 아버지 참판공의 업을 길이 받들기 위하여 一五五三년 봄에 가묘에 친필로 '장묘무문'을 써 엄명하심이니 그 현판이 오늘까지 존엄하게 보전되고 있어 그 번역문을 소개하니 오림(吾林)은 숙지하여 선조를 숭상하고 효행에 힘써 타의 모범이 될진저.

 




 
 



 ▲장묘우문(藏廟宇文)

 
▲문중 입의문(門中立議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