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화보)

 

영모정(永慕亭)

*15世 귀래정공 휘 붕(鵬)을 길이고 추모하기 위하여 아들 삼형제가 지은 정자*
ㅡ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번지 ㅡ

(2005년 5월 28일 중건후의 모습)  

 


▣귀래정(歸來亭)공 휘 붕(鵬)과 영모정▣

  귀래정(歸來亭)공(公) 임붕(林鵬 :1486-1553)의 자(字)는 충거(冲擧)요. 호(號)는 귀래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고 광주목사 재임중 작고하신 분인데 문학과 덕망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공의 부친 참판공(參判公) 휘(諱) 평(枰)께서 돌아가심에 이 자리에서 거려(居廬)를 하시고 이곳에 정자를 세울 뜻을 가젔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시었다. 그때 공의 자제들 중에 맏 아드님인 장수공 휘(諱) 익(益)은 돌아가신 뒤라 정자공 휘(諱)복(復)이 절도공 휘(諱)진(晉). 첨지공 휘(諱) 몽(蒙)과 함께 역시 이자리에서 거려를 하며 3년 상기를 마친 다음 드디어 이 정자를 세웠다. 명종 11년(1556년)의 일인데 정자 이름은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영모정(永慕亭)이라 한 것이다.

원래 건물은 정유재란시(1597년)소실 되었던 바 광해군 14년(1622년) 중건했으며 이후 누차 보수하였고 2005년에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10월 1일 이 곳에서 나주임씨 대종중의 삭회(朔會=정기총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정자는 회진 마을을 옆으로 하고 영산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기와 팔작 지붕에 4가(架) 3간(間)인데 서편으로 1칸은 방 나머지 2칸은 대청이다. 여기는 예로부터 명승으로 이름이 알려져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았으며 이 정자를 두고 읊은 시편들 또한 많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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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래정(歸來亭)공 휘 임붕(林鵬) 사적(事蹟) ▣

 공의 휘는 붕이요 자는 충거니 호는 귀래정이시다. 성종 병오八月六日에 낳으시고 중종 경오에 생원을 하시고 신사에 별시 문과로 한원옥서 은대양호 병마절도사와 계림(경주)부윤을 역임 하시고 명종조에 광주목사가되어 계축 六月에 졸하시니 증가선대부예조참판이다. 읍지에 曰 임붕은 평(枰)의 아들이니 호는 귀래정이다.

  문과에 오르기 전에 生員으로서 半官에 거할 때 기묘사화( 己卯士禍)를 만나 관학제생이 공을 추대하여 소두가 되어 정암 조광조를 힘써 구원하다 수차 불측한 지경에 빠질뻔 하였으나 그 때 사람들이다 옳다고 찬양하였다. 그후 청환에 올라 관이 부윤이 되시다.

  정원일기에 중종 기해에 임붕으로써 강원도관찰사에 임명하였더니 대간들이 공을 기묘인이라고 하여 이윽고 체임시켰다고 기록되다. 공이 젊어서 함평군 휘 이종의에게 수업을 하더니 대개 우후공 집에서 초동까지 十里가 가까워 매양 이른 새벽에 가서 수업을 할새 일일은 날이 아직 안 밝아 李公의 집 뜰 나무 밑에 의지하여 잠이 드니 李公 처의 꿈에 황룡이 그 나무 위에 사리어 있는지라 꿈을 깨어 노비를 시켜 가보게 하니 아직 잠이 깨지 안하였더라 그러므로 결친 할 뜻을 품어 드디어 딸과 결혼을 시켰더라 이상하의 전한 바로 창계공께서 이를 기하셨다.

  정암년보에 曰 그때에 태학생이 선생의 피첩됨을 듣고 앞을 다투어 궁궐에 나아간 분이 수千명이라 이약수와 신명인과 박광우 등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선생 무죄를 변명했으나 문지기의 막는 바되어 분이나서 대궐내정에 들어가 곡하니 곡성이 대내에 사무쳤다. 上이 들으시고 명하여 하옥시키니 생원 임붕 등 수百인이 또 상소하여 선생과 이약수를 취옥할 것을 신구하고 향약 제인이 또한 상소하고 부제學 이사균과 대사헌 유운과 전한 정응 등을 모두 구하여 줄 것을 상소하였다. 기묘록에 태학생 이약수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무죄함을 변명하여 서로 이끌고 대궐뜰에 들어가 곡성이 크게 떨치니 上이 곡성이 어디서 나느냐고 물으시니 정원이 사실로써 대답하니 전령하여 말하기를 유생들의 일로써 놀랠만한 일인즉 장중에 까지 난립함도 역시 죄가 되는 것이어늘 하물며 대궐뜰을 경솔히 들어와 통곡할 수 있으랴 하고 그 구금된 五六인을 또 구속하고 금군으로 하여금 이약수.윤언직,박세호 김수성, 이옥 등 오인을 쫓아내어 하옥시켰다. 이튿날 생원 임붕 등이 또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를 소구하고 또 어제 유생들을 하옥시킴으로 신 등이 가이 안연히 있을 수 없다하여 수백인이 궐문밖에서 命을 기다리기를 三日이 되더라 上이 이약수 등 석방을 명하고 그 疏에 답하여曰 광조 등의 처음 뜻이 어찌 국사를 그르치게 했으랴만 나로하여금 좋은 정치를 바랬으니 근래에 사람들이 과격한 일이 많기로 부득이 치죄했으니 대신들도 모두 국사를 인정코저 함이니 소인배가 군자를 배척함이 아니라고 말씀했다.

  광조 등이 이미 귀양을 가고 여러 소인들이 뜻을 얻어 李沃과 윤세정과 이래 三人이 상소하여 광조 淨 湜 自任 遵世 喜 薰等 八人을 죽이라고 청하니 서로 合하여 시론으로 말들이 극히 흉참 하더니 李沃은 처음 광조를 소구함으로써 하옥당한 사람으로 一年이 못되어 또 반듯이 죽이자고 하는데 참여하였으니 그 심술의 무상함이 이같더라.


 

《여지승람》왈 홍치(중국 명나라 효종 때의 호) 중에 사림 (士林) 참의(參議) 임붕 外 모모 十一人이 다 문장들로서 허여하고 詩와 술로 벗을 삼어 매양 가절이 되면 금강(현 영산강)에서 놀며 구경하기를 난정에 있던 고사와 같이 하였으니 일대 풍류들이 신선같이 여겼으며‘금강십일계’라 명목하여 박육봉우가 그 일을 기록하고 나한림 창이 또 詩를 지었고 호사하는 사람들이 그 초상을 그렸으니 그때에 모두 흠앙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 詩에 曰 「십일인의 옛고향 벗들이 맹세하니 그 심사가 세한의 송죽과 같더라 이세상의 영달하고 초최함이 뉘라서 선후하였던가 도화처럼 남만한봄을 이루지 말라」하였고 十一人이 배를 타고 낙범정 아래를 지나며 박연파에게 주는 시에 왈 "푸른 갈대와 섞은비에 술싣고 지내니 미녀들이 루에비겼더라 호수위 연파에 옛처사가 풍류에 늙었도다" 하였더니 진섬호 경문시화에 왈 "금성에 ‘십일인계’가 있으니 다 대성씨 노인들이니 왈 임참의 붕, 정상사문손, 김상사시, 김상사두두, 정공호, 진상사이손, 김공안복, 진공삼손, 세공 김공구, 나공일손 등은 매양 양진가절에 모여 유상하기를 옛적 난정 고사와 같으니 그 이름을 "금강계회도"라 하더라 박육봉우가 그 일을 기록하고 나한림 창이 詩를 써 부치니 한 때의 승사더라 이무 그림을 그려 두었으나 전하지 못하고 자손이 간직한 것도 정유란에 불타니 그림과 기록이 다 없어지고 썩지 안한 것은 十一人 성명과 시다. 계첩은 나공이 썼다 하고 《진세공집》에 전하고 있다하나 역시 병란에 잃었다.

 귀래정 나주임공 붕 유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