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府使) 이상 무∙음직(武 蔭職) 선조(先祖)

 

1) 임진(林晋) : 중종21년 병오(1526) ~ 선조20년 정해(1587)

* 계통 : 탁(卓) - 봉(鳳) - 시소(始巢) - 귀연(貴椽 )- 평(枰) - 붕(鵬)

* 자(字)는 희선(希善)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 붕(鵬)의 3子

* 명종1년 丙午(1546)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셨다.

* 선전관(宣傳官),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등을 거쳐 명종7년 임자(1552) 2월에 부안현감(扶安縣監). 흥해군수(興海郡守) 정평부사(定平府使)를 역임하고, 훈련원정(訓鍊院正)을 거쳐 선조2년 기사(1569) 1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흑산도(黑山島) 근해의 수적대선단(水賊大船團)을 섬멸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시고, 선조4년 신미(1571)에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하 약칭 병사), 선조6년 계유(1573) 2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가 되어 재임중 동년 8월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어 부임하여 재직중에 불순한 무리의 사주를 받은 1개 찰방(찰방)의 모함이 담긴 소(疏) 한 장에 헌부의 계(憲府의 啓 : 국경중지를 수비하는 장수에게는 비변사나 암행어사의 계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정사임)로 파직되고 그 후 가선품계까지 환수되었다.

선조7년 갑술 4월 가선자품(嘉善資品)이 환급(還給)되고 서용(敍用)되어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제수받아 부임하니 이 해 5,6월에 일어나는 왜구(倭寇)의 대거준동(大擧蠢動)에 일찍이 간신(奸臣)들의 모해(謀害)로 유배(流配)에서 풀려나셨어도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어 귀향하여 자질(子侄)들이나 교육시키며 지내시는 중형(仲兄) 복(復)께서도 아우를 염려하는 마음에 충격이 컸으니 이때 중형이 수십년간 깊이 탐구하신 병학(兵學)과 아우가 수십년간을 닦은 무학(武學)에 전라우수사로 다년간 관찰한 실무경험이 주효(奏效)하여 그려진 과선(戈船)의 도안(圖案)이 중형 복께서 취합하여 변수방책(邊守方策) 10여조로 상(上)에게 헌의(獻議)하여 가납(嘉納 : 받아들여짐)된 2,3조 중에 특히 과선의 도안은 비변사로 하여금 각 도 수사에게 명하여 도안 그대로 제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명(命)이 내려져 제조된 과선이 근 20년이후인 임진 정유란때 다행히도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수전승리(水戰勝利)에 원인이 되었음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 참고로 과선이란 다년간 공부하고 연구한 설계도가 없이 목수나 군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쉽게 제조할 수 없다.

임진, 정유란을 치룬 선조조의 기록에는 거북선이란 단어가 없다. 다만 과선 검선(劍船 : 배를 철갑으로 덮고 그 위에 칼을 총총히 꽂아 적이 접근치 못하게 하였기에) 등이 전쟁을 겪으며 목격한 문신들의 저서나 문집 등에 나온다. 어쨌든 간신배들에 의해 사판에서 출송(黜送)된지 20여년인 중형 등에게도 이 해 6월에 다시 서용의 전지(傳旨)가 내려지니 중형을 모해하던 세력은 이번에도 서용의 명을 거두라는 항소극론(抗疏極論)을30여차레 벌였으나 왕은 모두 물리치더니 어느날 밤 늦도록 침실에도 들지 못하고 시달리던 끝에 꺾이고 말았으며, 공께서는 이 해 직무를 철저히 수행하고 무사히 해를 넘겼으나 8년 을해(1575) 2월 29일 다른 사람을 임용하기 위해 파직시켰다가 4일 후인 3월 3일 서용령(敍用令)이 내려져 한직(閑職)으로 보내졌다.

선조10년 정축(1577)8월에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펴며 충암김정(忠庵金淨 : 中宗기묘사화때 형조판서로 이곳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음)의 사우(祠宇)를 지어 춘추로 배향케 하고 노비의 처 김천덕(金天德)을 정려(旌閭)하는 등 많은 선정을 하시고 임기가 넘어 선조12년 기묘(1579) 10월에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약칭 : 북병사. 함경남도 병사는 남병사로만 호칭됨) 떠나니 도민들은 고려조 이래 최초의 선정비인 추사청간 선정비(追思淸簡善政碑)를 동문내도좌편(東門內道左便)에 세웠다(탐라지와 청음 김상헌의 어사일지 참조).

왕께서는 중국의 역대청백리(歷代淸白吏)의 상징인물이요, 시인(詩人) 도연명(陶淵明. 陶潛)의 정절집(靖節集) 두 권(상,하)을 하사(下賜)하셨다(상권은 공의 2자 백화정 훤(煊)의 후손 채휴(采休)가 소장하고, 하권은 공의 3자 강계공 순(恂)의 후손인 필자가 소장하고 있다).

선조13년 경진(1580) 여름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平安道兵馬水軍節度使겸 寧邊大都護府使. 약칭 : 평안병사)로 가시니 이 곳에서도 선정을 펴셨기에 공이 떠나신 후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 약칭 : 청정비)가 세워졌고, 영변에서 읊으신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통개(筒蓋.화살통)베고 누어시니 보완다 보괴라 소리에 잠 못들어 하노라"라는 이 시조(時調)는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등 우리나라 삼대가집(三代歌集)에 전하고 김절제(金節齊.김종서)의 삭풍음(朔風吟) 이충무(李忠武 李舜臣)의 한산음(閑山吟)과 더불어 조선조 무장시조(武將時調)의 삼절(三絶)이라고도 한다.

선조16년 계미(1583)2월 장흥부사(長興府使)로 나아가 재임중 이해 7월 함경도에서 호란(胡亂)이 일어나 도성(都城)이 비었으니 방수(防守)하라는 명을 받아 상경하여 방위하시다가 선조18년 을유(1585)에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재임(再任)되어 재직중에 선조20년 정해(1587) 6월 5일 강진병영관아(康津兵營官衙)에서 졸하시니 향년 62세이시다.

막하 장수들과 군관들이 나주 신걸산으로 호송하여 가족장으로 모셨다.

 

2) 임순(林恂) : 명종8년 계축(1583) ~ 선조33년 경자(1600)

* 자는 자침(子忱) 호는 해은(海隱)으로 평안병사 진(晋)의 3자

* 선조조에 무과(武科)를 갑과(甲科)로 급제(及第)하셨다. 선전관(宣傳官)과 여러 경직(京職)을 역임하고 정주첨사(定州僉使)와 인주첨사(麟州僉使)등을 거쳐 선조19년 병술(1586)4월 함흥판관(咸興判官)이 되어 재임중에 이듬해 선조 20년 정해(1587)6월 5일 부친상을 당해 사직 귀향하여 상례시묘를 다하시고 22년 가을에 상경하셨다.

선조25년 임진(1592)3월 종성판관(鍾城判官)이 되어 재직중에 임진란으로 왜병들이 함경도를 휩쓰니 그 곳 동족반적(同族反賊)들이 함남병사(咸南兵使)의 부자(父子)와 수령찰방(守令.察訪) 노비(奴婢)등 20여명을 죽이고 병사의 목을 적에게 바쳐 그 앞잡이가 되니 부사까지도 함께 항복하자고 하며 어떤 임금을 섬기면 임금이 아니냐는 등의 항서(降書)를 보이므로 공은 단연 그 자리를 탈출하여 조정에 보(報)하고 오직 구국(救國)에 충성을 다하니 왕은 선조 동년 9월에 갑산부사(甲山府使)에 제수하였다.

선조26년 계사(1593)2월 공은 지략으로 극악한 주모자10여명을 잡아 참(斬)하고 그 밖의 동조자 200여명은 위엄(威嚴)과 덕(德)으로써 따르게 하고 공(功)으로써 면죄(免罪)케 하여 전시의 국력을 모으니 이해 2월 비변사(備邊司)의 계(啓)로 중상(重賞)이 내려져 통정(通政)에 승품(陞品)되었고 더욱 힘써 통일신라이후 국은(國恩)을 모르는 북방민(北方民)들을 잘 안무(按撫)하여 전력을 크게 일으키니 공년(公年) 43세이신 선조28년 을미(1595)9월에 다시 가자(加資)되어 가선대부함경남도병마수군절도사(嘉善大夫咸鏡南道兵馬水軍節度使)에 제수되었다. 전란중에도 당쟁은 지속되니 이때 전략상 명나라 사신과 일본의 장수 소서행장(小西行長)등이 화의(和議)를 논한다고 하여 전쟁이 조금 소강상태(小康狀態)가 되니 조정의 신하들이라는 자들은 제 편이 아니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함하여 축출하려는 자들에 의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전쟁의 장기전으로 늘 북계(北界)를 염려하던 중 이듬해 3월 만포첨사(滿浦僉使)와 평안병사의 중용(重用)이 논의되어 비변사에서 그 장재(將才)로 공을 1망(一望)에 이경준(李慶濬)을 2망에 천거하니 왕은 공을 만포첨사로 제수하였다. 공은 압록강 국경에서 전란(戰亂)동안 건주위여진족(建州衛女眞族)을 철통같이 방어하며 무역에 진력하여 전시의 국가재정을 도왔고 선조33년 경자(1600)7월에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어 부임하여 재임중 이해 9월17일에 졸하시니 향년 48로 아쉬운 수명이셨다.

 

3) 임타(林㙐) : 선조26년 계사(1593) ~ 현종5년 갑진(1664)

* 계열 : 복(復)-협(悏)

* 는 실지(實之)호는 몽촌(夢村)으로 선무랑협(宣務郞悏)의 1子

* 광해10년 무오(1618)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생원,진사 양시(兩試)에 입격, 인조1년 계해(1623)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내섬시주부(內贍施主簿), 장례원사평(掌禮院司評) 인조1년 계해(1623)9월 1일 장례원사평으로 정사원종1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에 재종형님(再從兄님)축과 더불어 녹훈(錄勳)되시다.

인조 3년 을축(1625)9월 21일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떠나다. 인조8년 경오(1630) 8월 16일 군기시주부(軍기寺主簿) 인조10년 임신(1632)10월 순창군수(淳昌郡守) 인조19년 신사(1641)9월 칠곡부사(漆谷府使) 애민선정비 인조21년 계미(1643)12월 25일 서산군수(瑞山郡守) 인조24년 병술(1646)9월9일 호조정랑(戶曹正郞) 12월26일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 인조25년 정해(1647)3월 6일 함흥판관(咸興判官) 인조26년 무자(1648) 5월 함흥판관으로 재임중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한 나라의 범인을 잡은 공으로 당상관통정(堂上官通政)에 오르시고 6월 9일 오위장(五衛將)이 되다. 12월 금산군수(錦山郡守)에 제수되어 인조27년 1월 금산군수 도임(到任)하시다.

효종4년 계사(1653)1월 21일 이천부사(利川府使)에 제수되시다. 효종5년 갑오(1654) 상주목사(尙州牧使) 효종7년 병신(1656)2월 상주목사(尙州牧使) 노비(奴婢)문제로 일시 체임되었다가 복직되었고 효종9년 무술(1658)8월 오위장을 끝으로 신병사직하셨다.

현종5년 갑진(1664)7월 27일 졸하시니 향년72세이시다.

 

4) 임상유(林商儒) : 광해9년 정사(1617) ~ 현종10년 기유(1669)

* 계통 : 붕(鵬) - 익(益) - 연(埏)

* 자는 상경(商卿)으로 진사 순능참봉(順陵參奉)연(埏)의 2子

* 인조23년 을유(1645)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及第)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효종즉위년 기축(1649)10월13일 비변사랑청(備邊司郞廳), 효종1년 경인(1670) 8월 7일 위원군수(渭原郡守)에 제수, 효종4년 계사(1653) 8월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도임(到任), 효종5년 갑오(1654) 1월 제주판관. 부친상(父親喪)으로 귀향 상례시묘하시다.

효종7년 병신(1656) 9월 27일 통훈(通訓) 진도군수(珍島郡守)도임, 효종8년 정유(1657) 7월 12일 진도군수. 모친상(母親喪)으로 귀향하시다.

현종1년 경자(1660) 5월 25일 삭주부사(朔州府使)에 제수, 현종1년 경자(1660) 7월 16일 삭주부사(朔州府使)에 하직사조(下直辭朝), 현종5년 갑진(1664) 6월 21일 부령부사(富寧府使)에 제수, 7월 11일 부령부사(富寧府使)에 하직사조,  현종6년 을사(1665) 12월 부령부사(富寧府使) 몸을 다쳐 공무에 차착(差錯)이 있어 체임, 현종7년 병오(1666) 7월 2일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8월 20일 진주영장(晋州營將), 현종8년 정미(1667) 4월 경주영장(慶州營將), 12월24일  우림위장(羽林衛將), 현종9년 무신(1668) 2월 7일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제외한 4조에서 병사를 천거할 때 공조에서 林商儒 등을 병사후보로 천거, 8월 26일 온양행궁외순장(溫陽行宮外巡將), 12월 7일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제수되여어 부임하여 재임중 이듬해

현종10년 기유(1669) 4월 8일 김해부사 관아에서 졸하시니 향년이  53세 이셨다.

 

5) 임세량(林世良) : 효종2년 신(1651) ~ 숙종 34년 무자(1708)

* 계통 : 서(㥠) - 연(堜) - 종유(宗儒)

                         ㄴ담(墰)

* 자는 필경(弼卿)으로 어모장군세자시강원부수(禦侮將軍世子侍講院副수)종유(宗儒)의 2子

* 숙종10년 갑자(1684)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생원에 드시다 .

숙종14년 무진(1688) 1월 8일 사포서별검(司圃署別檢), 숙종15년 기사(1689) 1월 30일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6월 22일 형조좌랑(刑曹佐郞), 숙종16년 경오(1690) 1월 17일 용안현감(龍安縣監), 숙종22년 병자(1696) 5월 5일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숙종22년 병자(1696) 5월 20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병자(1696) 5월 22일 공조정랑(工曹正郞), 병자(1696) 5월 23일 형조정랑(刑曹正郞), 숙종23년 정축(1697) 6월 6일 함열현감(咸悅縣監), 숙종24년 무인(1698) 2월 함열현감 체임하고 귀향하시다.

숙종26년 경진(1700) 8월 2일 안산군수(安山郡守) 하직인사하고 부임, 숙종31년 을유(1705) 1월 25일 장성부사(長城府使)에 제수.

숙종34년 무자(1708) 3월 9일 관아(官衙)에서 졸하시니 향년 58세이시다.

안산에 거사비(去思碑)가 현존(現存)하고 장성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현존하다.

 

6) 임세양(林世讓) : 효종10년 기해(1659) ~ 영조9년 계축(1733)

* 계통 : 복(復)  - 서(壻) - 담(墰) - 굉유(宏儒)

* 자는 퇴백(退伯) 득지(得志)로 봉정대부행청암찰방(奉正大夫行靑巖察訪) 굉유의 1子

* 숙종22년 병자(1696)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생원에 드시다.

숙종32년 병술(1706) 1월 장릉참봉(章陵叅奉)이후 돈영부봉사(敦寧府奉事)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등을 거쳐 숙종36년 경인(1710) 2월 22일 호조좌랑(戶曹佐郞), 숙종37년 신묘(1711) 4월 1일 호조정랑(戶曹正郞). 6월 29일 남평현감(南平縣監)에 제수, 8월에 도임하시다.

경종즉위년 경자(1720) 7월 18일 공조정랑(工曹正郞), 12월 1일 공조정랑국장도감도청랑관(國葬都監都廳郞官.숙종예장)으로 아마한필(兒馬一匹)을 사급(賜給), 경종1년 신축(1721) 5월 18일 금구현령(金溝縣令), 경종2년 임인(1722) 3월 26일 양근군수(陽根郡守), 경종3년 계묘(1723) 8월 1일 부평부사(富平府使), 경종4년 갑진(1724) 7월 18일 종묘령(宗廟令).

영조4년 무신(1728) 3월 8일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영조5년 기유(1729) 2월 19일 광흥창수(廣興倉守), 영조7년 신해(1731) 3월 7일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영조9년 계축(1733) 4월 5일 졸하시니 향년 75이시다

 

7) 임세겸(林世謙) : 숙종3년 정사(1677) ~ 영조5년 기유(1729)

* 계통 : 서(壻) 담(墰) 굉유(宏儒)

* 자는 겸지(謙之) 익보(益甫)로 봉정대부행청암찰방(奉正大夫行靑巖察訪) 굉유의 2子

* 숙종28년 임오(1702)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생원에 드셨다.

숙종40년 갑오(1714) 6월 14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 숙종42년 병신(1716) 7월 5일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12월 26일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12월 27일 공조정랑(工曹正郞),  영조2년 병오(1726) 7월 7일 호조정랑(戶曹正郞), 영조3년 정미(1727) 10월 2일 옥천군수(沃川郡守)에 제수, 영조4년 무신(1728) 3월에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이 충청도 청주에서 일어나니 옥천과 는 지근(至近)간으로서 참으로 위험에 처했다고 할 수 있었으나 공의 기민한 활략으로 토벌에 나온 도원수 오명항(都元帥吳命恒)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영조4년 무신(1728) 4월 26일 아우 세즙(世諿)과 더불어 분무원종1등공신(奮武原從1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공은 29일 당상통정대부(堂上通政大夫)에 제수되었는데 사정에 의해 부임을 미루고 옥천군수로 유임중 이듬해인 영조5년 기유(1729) 1월 27일 옥천 관아에서 졸하시니 향년53이시다

 

8) 임정(林淨) : 효종5년(1654) ~ 숙종36년 경인(1710)

* 계열 : 복(復) - 협(悏) - 타(㙐) - 일유(一儒)

* 자는 도충(道沖) 호는 매계(梅)로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행한성서윤(通政大夫僉知中樞副使行漢城庶尹) 일유(一儒)의 4子

* 숙종8년 임술(1682)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생원에 드시다.

숙종15년 기사(1689) 1월 17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숙종20년 갑술(1694) 5월 26일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숙종22년 병자(1696) 3월 6일 화순현감(和順縣監) 제수 하직, 부임후 27년 신사(1701) 1월까지 근 5년간 재임, 숙종27년 신사(1701) 12월 27일 평시서령(平市署令), 숙종28년 임오(1702) 1월 11일 형조정랑(刑曹正郞), 숙종29년 계미(1703) 7월 16일 강화경력(江華經歷)에 제수 하직, 숙종31년 을유(1705) 윤 4월8일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제수, 숙종32년 병술(1706) 3월 남원부사(南原府使) 체임, 숙종32년 병술(1706) 8월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도임, 숙종37년 신묘(1801) 2월 청도군수(淸道郡守) 임기가 넘어 체임,  이 곳에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가 현존하다.

숙종36년 경인(1800) 2월 23일 졸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니 청도읍지에 오기(誤記)가 있었는 지, 우리 족보에 오기가 있었는지 의문이 조금 가지만 읍지에 오기 있었겠지요. 족보대로라면 향년이 57이시다.

 

9) 임상익(林象翼) : 숙종16년 경오(1690) ~ 영조41년 을유(1765)

* 계통 : 복(復) - 서(㥠) - 연(堜) - 종유(宗儒) - 세량(世良)

                                 ㄴ담(墰)

* 자는 휘보(휘(輝)보(輔)로 통훈대부행장성도호부사(通訓大夫行狀성都護府使) 世良의 3子

* 숙종40년 갑오(1714)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드시다.

경종1년 신축(1721) 4월 경릉참봉(敬陵叅奉)에 이어 장생전감조관(長生殿監造官)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등을 거쳐 영조7년 신해(1731)8월 4일 호조좌랑(戶曹佐郞),  영조8년 임자(1732) 7월 8일 포천현감(抱川縣監), 영조9년 계축(1733) 10월 15일 모친상(母親喪)으로 사직 귀가하여 상례시묘하시다. 영조13년 정사(1737) 4월 4일 평시서령(平市署令), 윤 9월 3일 평택현감(平澤縣監),  공도 이곳에서 3년여간 얼마나 선정을 하셨는지 현민들이 공의 불망생사당을 세웠는데 후일 국법상 부득이 나라에서 헐게 되니 현민들의 거부를 무마하여 그 자리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리도록 하였다. 영조16년 경신(1740) 8월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도임(到任), 영조19년 계해(1743) 윤 9월 익산군수(益山郡守) 체임 귀경(歸京), 영조21년 을축(1745) 10월 13일 함흥판관(咸興判官)에 제수, 영조21년 을축(1745) 11월 11일 함흥판관(咸興判官) 하직하고 임지로 가시다 영조22년 병인(1746) 11월 22일 함흥판관(咸興判官) 체임, 영조25년 기사(1749) 4월 19일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 영조25년 기사(1749) 7월 18일 인천부사(仁川府使), 영조27년 신미(1751) 12월 21일  인천부사(仁川府使)체임, 영조30년 갑술(1754) 5월 18일 면천군수(沔川郡守), 영조33년 정축(1757) 5월 면천군수(沔川郡守)체임, 영조39년 계미(1763) 1월 1일 전부사 가자통정(加資通政), 계미(1763) 1월 3일 첨지중추(僉知中樞), 계미(1763) 2월 3일 오위장(五衛將), 계미(1763) 5월 23일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영조41년 을유(1765) 2월 1일 졸하시니 향년 76세이시다.

 

10) 임상정(林象鼎) : 숙종7년 신유(1681) ~ 영조31년 을해(1755)

* 계통 : 서(㥠) - 연(堜) - 종유(宗儒) - 세검(世儉)

                       담(墰)

* 자는 덕중(德重)으로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봉상시정(通訓大夫 司憲府 執義 奉嘗寺正), 세검(世儉)의 아들

* 숙종25년 기묘(1699)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진사,

경종2년 임인(1722) 9월 22일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 : 여기서는 세자가 아니고 세제(世弟)임))으로 세제입학(世弟入學)시의 공으로 불장궁(不粧弓) 일장(一張) 사급(賜給), 경종3년 계묘(1723) 4월 12일 익위사 부수(副率), 영조 즉위년 갑진(1724) 9월 28일 한성주부(漢城主簿),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1월 3일 형조좌랑(刑曹佐郞), 영조3년 정미(1727) 12월 20일 삼등현령(三登縣令)

공은 이곳에서 현민(縣民)의 간청으로 영조9년 계축(1733) 10월까지 6년간을 재임하셨는데 평안도를 다녀온 어사 이종성(御史 李宗城)의 보(報)에 삼등현의 근방 100리(百里)까지 풍속이 순하고 아름다워졌다 하고 현민들은 살아있는 공의 사당(生祠堂)을 지었으며, 이것을 25년 후인 영조 34년에 국법에 의해 헐려고 하니 현민들의 거부가 너무커서 왕께서도 부득이 공의 화상(畵像)을 보내어 비석(碑石)에 새겨 그 사당 자리에 세우라고 명하고 공에게는 나주(羅州)나 청주(淸州) 등 거읍(巨邑)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우선 준직(準職 : 당하정 3품직)에 제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으니 장악원정 자리는 이 때 내정된 직품이었다. "

영조9년 계축((1733) 11월 5일 장례원 사의(掌禮院 司議), 영조10년 갑인(1734) 1월 25일 백천군수(白川郡守), 영조11년 을묘(1735) 2월 5일 종묘령(宗廟令),4월 20일 비망기(備忘記)에 의해 공조좌랑으로 현빈궁 옥인 조성시(賢嬪宮 玉印造成時)의 공으로 상현궁 1장 사급(上弦弓 一張賜給), 4월 21일 진산군수(珍山郡守)로 하직, 9월 9일 청풍부사(淸風府使), 영조 12년 병진(1736) 8월 3일 순흥부사(順興府使) 제수, 8월 23일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직인사, 영조 17년 신유(1741) 2월 순흥부사(順興府使) 임기가 넘어 체직, 영조18년 임술(1742) 11월 23일 성천부사(成川府使), 영조19년 계해(1743)  9월 성천부사(成川府使) 체임, 영조23년 정묘(1747) 5월 19일 사직서령(社稷署令), 9월 2일 한성서윤(漢城庶尹), 12월 19일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 영조25년 기사(1749) 3월 25일 강화경력(江華經歷), 영조27년 신미(1751) 2월 2일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신후 동년7월 신병으로 사임하시고 영조31년을해(1755)11월10일 졸하시니 75세 이시다.

경종1년 8월부터 4년 8월까지 약 3년간을 세제(世弟 영조)를 익위사(계방(桂枋))에서 시종하며 학업을 돕기 위해 편저(編著)한 사통(史統) 35권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고, 자오록(自誤錄) 4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1) 임거(林蘧) : 숙종21년 을해(1695) ~ 영조21년 을축(1745)

* 계통 : 복(復) - 협(悏) - 타(㙐) - 일유(一儒) - 정(淨)

* 자는 경옥(景玉)으로 통훈대부남원부사(通訓大夫南原府使) 정(淨)의 二子

* 왕의 부르심으로 음직출사(蔭職出仕) 하셨다.

영조7년 신해(1731) 3월 11일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 이어 겸 산능도감랑청(兼山陵都監郞廳),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 영조8년 임자(1732) 봉책관 돈령주부(捧冊官敦寧主簿) 등 아마(兒馬) 한필(一匹)을 사급(賜給), 영조  9년 계축(1733)  1월 진천현감(鎭川縣監)으로 도임(到任), 영조10년 갑인(1734) 10월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도임(到任), 영조12년 병진(1736)  9월 익산군수(益山郡守) 체직 후 귀경, 12월 12일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 영조13년 정사(1737) 1월 11일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8월 1일 부평부사(富平府使), 영조14년 무오(1738)  8월 2일 부평부사(富平府使) 사직, 영조15년 기미(1739)  5월 24일 안악현감(安岳縣監 : 원래 큰 郡인데 잠시 현으로 낮추어짐)), 영조17년 신유(1741)  1월  9일 승안악군수 겸 중영장(陞安岳郡守 兼 中營將), 9월 15일 안악군수 체직,  영조21년 을축(1745) 1월 28일 한성주부(한성주부), 영조 21년 을축(1745) 5월 28일 졸하시니 향년 51로 세영조대왕의 친동서이신데 수명이 너무 아쉬웠다.

진천(鎭川)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현존

 

12) 임준호(林浚浩) : 영조14년 무오(1738) ~ 정조16년 임자(1792)

* 계열 : 복(復) - 서(㥠) - 담(墰) - 굉유(宏儒) - 세집(世諿) - 상원(象元)

* 초명은 준호(濬浩)요, 자는 경심(景深)으로 의주부윤(義州府尹) 상원(象元)의 長子

* 영조44년 무자(1768)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생원, 영조49년 계사(1773) 윤 3월 22일 세작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영조51년(1775) 6월 20일 형조좌랑(刑曹佐郞), 정조2년 무술(1778) 1월 23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조2년 무술(1778) 9월 15일 과천현감(果川縣監)에 제수, 정조2년 무술(1778) 12월 27일 과천현감(果川縣監) 체임, 정조4년 경자(1780) 3월 29일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재임, 5월 11일 서흥현감(瑞興縣監)에 제수, 정조7년 계묘(1783) 6월 25일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 6월 29일 호조정랑(戶曹正郞), 12월 22일 예천군수(醴泉郡守) 제수, 정조11년 정미(1787) 5월 23일 예천군수(醴泉郡守)께서 자비양곡(自備糧穀) 342석(석)을 진휼곡(賑恤穀)으로 내셨다는 진휼당상의 계(啓), 6월 9일 장성부사(長城府使)에 제수, 정조 4년 경술(1790) 2월 21일 장성부사(長城府使) 체직하시니 사업제를 역임하셨다, 정조15년 신해(1791) 9월 16일 선혜청 영남랑청(宣惠廳 嶺南郞廳) 재직, 12월 2일 선혜청 재임.  정조16년 임자(1792)12월1일 졸하시니 향년55세이시다.

 

13) 임하철(林夏喆) : 영조9년 계축(1733) ~ 정조22년 무오(1798)

* 계통 : 서(㥠) - 연(堜) - 종유(宗儒) - 세량(世良) - 상규(象奎) - 기호(氣浩)

                     ㄴ담(墰)

* 자는 화숙(和叔)으로 첨추(僉樞) 기호(氣浩)의 二子

* 영조39년 계미(1763)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 영조51년 을미(1775) 1월 11일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신 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 부묘도감 감조관(祔廟都監 監造官)의 공(功)으로 6품에 올라 전설사별제(典說司別堤),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정조2년 무술(1778) 12월 24일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승품(陞品), 정조3년 기해(1779) 6월 14일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제수되어 7월 4일 하직하고 임지로 떠나, 정조5년 신축(1781) 2월 금구현령(금구현령)으로 옮기시고, 12월 27일 김포군수(金浦郡守)에 제수되어 재직중에 정조6년 임인(1782) 9월 15일 김포군수(金浦郡守)를 사하셨다. 정조11년 정미(1787) 1월 24일 곡성현감(谷城縣監)으로 제수되어 재임중에 정조12년 무신(1788) 3월 20일 부친상(父親喪)으로 사임귀가(辭任歸家)하여 상례시묘(喪禮侍墓), 정조20년 병진(1796) 10월 25일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12월 6일 돈령부주부(敦寧府主簿), 12월 25일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정조 21년 정사(1797) 6월 25일 양근군수(陽根郡守)에 제수되어 윤 6월에 도임(到任)하여 다섯번째 고을살이를 하시다가 이듬해인 정조22년 무오(1798) 9월 28일 양근관아에서 졸하시니 향년 66세이시다.

 

14) 임현철(林顯喆) : 영조50년 갑오(1774) ~ 헌종6년 경자(1840)

* 계통 : 복(復) - 서(㥠) - 담(墰) - 굉유(宏儒) - 세집(世諿) - 한호(漢浩)

* 자는 문세(文世)로 우의정(右議政) 한호(漢浩)의 長子

* 순조10년 경오(1810) 식년사마시(식년사마시) 생원 입격,

순조12년 임신(1812) 2월 11일 공능참봉(恭陵參奉)이 되신 후 사재시봉사(司宰寺奉事),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등을 역임, 순조16년 병자(1816) 12월 22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순조17년 정축(1817)  8월 10일 사직서령(社稷署令)으로 재직, 순조18년 무인(1818) 5월 28일 영유현령(永柔縣令)에 제수되어 도임(到任), 순조20년 경진(1820) 7월 11일 아산현감(牙山縣監), 순조22년 임오(1822) 7월 12일 임천군수(林川郡守) 부임, 순조23년 계미(1823) 3월 6일 휘경원(순조의 사친원빈 박씨의 묘소)의 장례도감랑관의 공으로 승서(陞敍)되셨고, 이어 24년 갑오(1824) 12월 22일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 25년 을유(1825) 7월 6일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시고, 동년 12월 28일 상의원첨정에 제수되셔서 재직하시다가, 순조 26년 병술(1826) 2월 7일 양근군수(陽根郡守)로 제수되어 부임하여 재직중에 27년 정해(1827) 10월 15일 부친상(父親喪)으로 사임하시고 귀가하여 상례시묘(喪禮侍墓)를 다하셨으며, 순조30년 경인(1830) 7월 19일 공조좌랑이 되시고, 이어 동년 9월 11일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아가 선정, 순조32년 임진(1832) 3월 6일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어 재임하시다가 이듬해 33년 계사(1833) 10월에 체임되신 후 노년(老年)을 보내시다가 헌종6년 경자(1840) 11월 13일 졸하시니 향년 67세이시다.

공이 여섯고을을 지내시고 아드님 5형제를 두시어 4형제가 출사하여 고을들을 지내시고 특히 넷째 아드님은 문과를 하여 이조참판이요, 손자분들도 고을살이를 많이 하셔서 3대에 20여 고을살이를 하여 조선조 역대 정승들 중에 공의 선고이신 임한호 정승(林漢浩 正丞)댁이 제일 다복한 정승댁으로 고종(高宗) 초 후기까지 조정에서 두루 알려지고 전해졌으니 자랑스러운 문벌이었다.

 

15) 임무원(林懋遠) : 영조16년 경신(1740) ~ 정조19년 을묘(1795)

* 계통 : 복(復) - 협(悏) - 타(㙐) - 일유(一儒) - 정(淀) - 장(莊) - 연하(衍夏)

* 자는 치적(致績)으로 한생 연하(衍夏)의 3子

* 정조4년 경자(1780) 식년문무과시(式年文武科試)에 무과급제(武科及第), 6월 1일 선전관(宣傳官) 이후 여러 경직(京職)을 거쳐 정조12년 무신(1788) 6월 2일 무겸(武兼 : 무신 겸 선전관)이 되신 후, 정조14년 경술(1790) 12월 20일 훈련원주부 선전관 겸 사헌부 감찰(監察), 정조15년 신해(1791) 6월 24일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어 재직중에 이 해 12월에 고성현령에 제수되었기 전임자에게 사정이 있어 부임을 유보하고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거쳐 6월 20일 명천부사(明川府使), 정조17년 계묘(1793) 6월 24일 나주영장에 제수되니 고향이라고 해서 공주와 바꿔서 6월 25일 공주영장(公州營將)과 바꿔 부임, 정조18년 갑인(1774) 12월 13일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12월 15일 충익위장(忠翊衛將)으로 재직하시다가 정조19년 을묘(1775) 6월 6일 졸하시니 향년 56세이시다.

 

16) 임중원(林重遠) : 영조2년 병오(1726) ~ 정조 12년무신(1788)

* 계열 : 붕(鵬) - 진(晋) - 순(恂) - 축(埱) - 장유(長儒) - 치(治) - 예(藝) - 석헌(錫憲)

                        복(復) - 타(㙐)                                                      ㄴ성헌(聖憲)

* 자는 사의(士毅)로 문과 분승지 겸 부령부사(文科分乘旨兼富寧府使) 석헌(錫憲)의 자요, 임천군수 성헌(林川郡守 聖憲)은 생(生父)

* 왕의 부르심으로 음직출사(蔭職出仕)

* 영조46년 경인(1770) 6월 22일 동몽교관(童蒙敎官) 제수, 8월 3일 정릉직장(靖陵直長), 영조47년 신묘(1771) 9월 8일 사옹직장(司饔直長), 12월 22일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제수 , 영조48년 임진(1772)) 4월 8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7월 28일 동부도사(東部都事), 영조 51년 을미(1775) 1월 11일 남부도사(南部都事), 6월 20일 연기현감(燕岐縣監) 제수,  정조2년 무술(1778) 1월 23일 창평현령(昌平縣令) 제수, 정조4년 경자(1780) 6월 5일 고양군수(高陽郡守) 제수, 정조6년 임인(1782) 3월 1일 고양군수(高陽郡守)에게 장궁1장(長弓一張), 장전1부(長箭一部), 편전1부(片箭一部), 통아 1개(筒兒一箇)를 사급(賜給), 정조7년 계묘(1783) 6월 14일 무주부사(茂朱府使)에 제수, 공은 퇴락한 한풍류(寒風樓)를 공의 종6대조(從六代祖) 백호공 제(白湖公 悌) 습정공 환(習靜公 懽)과 한풍루와의 연고를 회상하며 중수, 이곳에 공의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정조9년 을사(1785) 4월 19일 능주목사(綾州牧使)에 제수, 정조11년 정미(1787) 4월 5일 능주목사 체임, 정조12년 무신(1788) 6월 9일 졸하시니 향년 63세이시다.

 

17) 임병원(林秉遠) : 영조24년 무진(1748) ~ 순조20년 병진(1820)

* 계열- 진(晋) -순(恂) - 축(埱) - 장유(長儒) - 치(治) - 예(藝) - 석헌(錫憲)

                      복(復) -  타(㙐)                                                         "

* 자는 사문(士文)으로 문과분승지 겸 부령부사(文科分承旨兼富寧府使) 석헌(錫憲)의 2子

* 정조10년 병오(1786)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 진사에 입격

* 정조10년 병오(1786) 윤 7월 5일 광릉참봉(光陵參奉), 이후 금부도사(禁府都事), 내섬시봉사(내贍寺奉事), 순릉직장(順陵直長), 광릉령과 직장(光陵令과 直長), 상의원주부(尙衣院主婦),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거쳐 정조14년 경술(1790) 5월 5일 황해도 병산현령에 제수, 정조16년 임자(1792) 12월 20일 명천부사(明川府使)에 제수, 정조17년 계축(1793) 12월 27일 의영고 주부, 호조좌랑, 경모궁령 역임, 정조23년 기미(1799) 5월 8일 익산군수(益山郡守) 제수, 순조즉위년 경신(1800) 12월 수원판관(水原判官), 순조1년 신유(1801) 3월 건릉(健陵)에 식목을 심은 공의 시상으로 아마(兒馬) 한필 사급(賜給), 건릉의 정자각(丁字閣) 개수의 공으로 승서(陞敍), 순조2년 임술(1802) 2월 10일 수원판관 겸 경리령 종사관(經理營 從事官), 6월 4일 체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순조5년 을축(1805) 12월 28일 공조정랑(工曹正郞), 순조6년 병인(1806) 5월 1일 남원부사(南原府使) 제수, 순조8년 무진(1808) 8월 13일 남원부사(南原府使) 체직, 순조13년 계유(1813) 3월 22일 軍資監判官), 순조17년 정축(1817) 8월 30일 장악원정(장악원정), 순조18년 무인(1818) 3월 15일 광흥창령(廣興倉令) 제수, 순조20년 경진(1820) 9월 11일 졸하시니 향년 73세이시다.    

 

18) 임태수(林泰洙) : 정조15년 신해(1791) ~ 철종3년 임자(1582)

* 계열 : 서(서) - 연(堜) - 종유(宗儒) - 세량(世良) - 상로(象老) - 정호(正浩) - 한철(漢喆) - 성진(星鎭)

                         ㄴ 담(墰)                                                         ㄴ명호(命浩) - 석철(錫喆)"

* 자는 노원(魯源)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 성진(星鎭)의 子

* 순조31년 신묘(1831)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진사장원(進仕壯元)

* 헌종6년 경자(1840) 3월 18일 원릉참봉(元陵參奉), 헌종7년 신축(1841) 윤(閠) 3월 5일 원릉참봉(元陵參奉) 원릉의 친제(親祭 : 왕이 직접 제사에 참례) 때 공으로 6품에 승자됨, 헌종8년 임인(1842) 3월 24일 형조정랑(刑曹正郞), 6월 22일 음성현감(陰城縣監) 제수, 헌종11년 을사(1845) 12월 27일 고양군수(高陽郡守) 제수, 이듬해 1월 25일 하직사조(下直辭朝)를 하니 장궁 1장, 장전 1부, 편전 1부, 통아 1개를 사급(長弓一張,長箭一部,片箭一箇 賜給) 받으셨고, 이곳에서 임기 2년을 넘기고 30개월을 선정하셨기에 헌종14년 무신(1848) 6월 25일 청송부사(靑松府使), 이곳에서도 크게 선정하였기에  지금도 선정비(善政碑)가 현존해 있다.

* 철종1년 경술(1850) 6월 26일 문천군수(文川郡守), 철종3년 임자(1852) 9월 18일 충주목사(忠州牧使) 제수되어 재임중에 철종4년 계축(1853) 1월 10일 병환으로 졸하시니 향년 63세이시다.

 

19) 임승수(林勝洙) : 순조16년 병자(1816) ~ 고종10년 계유(1873)

* 계열 : 붕(鵬) - 진(晋) - 순(恂) - 축(埱) - 장유(長儒) - 치(治) - 예(藝) - 성헌(聖憲) - 정원(鼎遠) - 한진(翰鎭)

                                  복(復) - 협(悏) - 타(㙐)  "

* 자는 치경(稚敬), 호는 현거(玄居)로 예조참판(禮曹參判), 강화유수(江華留守) 한진(翰鎭)의 3子

* 헌종1년 을미(1835) 을미증광시(乙未增廣試) 진사 100명 중 12순위로 입격

* 철종7년 병진(1856) 10월 17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신 후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거쳐 철종10년 기미(1859) 6월 25일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0월 13일 경모궁령(景慕宮令)으로 재임하시다가 12월 24일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어 부임 재직중에 중형 긍수(肯洙)가 전라감사로 제수, 부임차 오고 있으므로 법전에 의해 음피혐(應避嫌)에 해당하여 다른 고을과 바꾸게 되어 철종11년 경신(1860) 3월 6일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부임, 철종13년 임술(1862) 윤 8월 3일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이배(移拜)되어 임기를 많이 넘기며 선정을 펴시다가 4년만에 중형의 뜻에 따라 고종3년 병인(1866) 6월 22일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오셔서 고을을 다스리며 장흥과 접경인 영암군 신북면 호산(虎山) 公等의 5대조(五代祖)와 6대조(六代祖)의 제각을 중형께서 전라감사 재임시 건립하시다가 준공(竣工)을 못하고 귀경(歸京)하셨기에 이를 완공하고 묘지 5家口(墓地五口)까지 하사(下賜)받아 입주시키는 큰 일을 하셨는데 전임지 예천에서 서둘러 새 임지로 오시느라고 미결된 공무가 있었는지 고종4년 정묘(1867) 7월에 파직되고 8월 26일 전라도 김제군(金堤郡)에 정배(定配)되셨는데 정배지에서도 오직 선영의 일과 종사만을 걱정하시며 인편으로 보내신 눈물겹도록 고귀한 서찰(書札)은 필자가 보관하고 있으며, 앞으로 자손대대로 잘 보존할 것입니다. 그후 풀려 나셨고 6년 12월 1일 서용(敍用)의 전지(傳旨)가 내려졌으나 관로에는 뜻이 없이 소일하시다가 고종 10년 계유(1873) 5월 4일 졸하시니 향년 58세이시다.

 

20) 임철수(林徹洙) : 순조17년 정축(1817) ~ 고종20년 무진(1883)

* 계열 : 진(晋) -  축(埱) - 장유(長儒) - 치(治) - 기(夔) - 도현(道憲) - 태원(泰遠) - 처진(處鎭)

                                   복(復) - 타(㙐)                                                                ㄴ제원(濟遠)

* 자는 주백(周百)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 처진(處鎭)의 長子

* 영조49년 계사(1773)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進仕)에 입격

* 고종2년 을축(1865) 4월 4일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시고, 이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와서별제(瓦署別提) 역임, 고종7년 경오(1870) 7월 10일 전성서판관(典性署判官), 11월 29일 임실현감(任實縣監) 제수, 이곳에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져 있었다.

고종 9년 임신(1872) 7월 16일 대구판관(大邱判官)에 제수, 이곳에서는 11년 8월을 전후해서 상당기간 경상도사의 결원으로 가도사(假都事)의 칭호로 도사의 직무를 겸직하였다.

고종11년 갑술(1874) 12월 29일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 여규익의 서계(呂圭益의 書啓)로 인해 임실현감 재임시의 선정으로 포상(褒賞)이 내려져 승품서용(陞品敍用)케 되었다.

고종12년 을해(1875) 7월 24일 괴산군수(槐山郡守) 제수, 고종14년 정축(1877) 6월 20일 순흥부사(順興府使), 고종 16년 기묘(1879) 6월 25일 옥구현감(沃溝縣監), 고종19년 임오(1882) 8월 13일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제수, 고종20년 계미(1883) 6월 21일 양근군수(陽根郡守). 고종20년 계미(1883) 10월 26일 양근관아에서 졸하시니 향년 67세이시다.

 

21) 임연상(林淵相) : 고종7년 경오(1870) ~ 순종 무인(1938)

* 계열 : 진(晋) -  순(恂) - 축(축) - 장유(長儒) - 치(治) - 기(夔) - 도현(道憲) - 태원(泰遠) - 처진(處鎭) - 휘수(徽洙)

                    복(復) - 협(悏) - 타((㙐)                                                                             ㄴ 제원(濟遠)

* 자는 비보(斐甫)로 부사과(副司果) 휘수(徽洙)의 長子

*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

* 고종 광무6년 임인(1902) 4월 1일 임외부주사서판임관 6등(任外部主事敍判任官六等), 고종7년 계묘(1903) 12월 17일 외부주사 임부안감리서주사(任務安監理署主事), 고종8년 갑진(1904) 2월 21일 무안감리서주사 임외부주사, 서판임관 6등, 고종9년 을사(1905) 4월 6일 외부주사서판임관 4등, 고종10년 병오(1906) 1월 20일 6품 임의정부주사(任議政府主事) 서판임관 6급, 윤 4월 10일 의정부주사 승급봉(陞級俸), 고종11년 정미(1907) 4월 5일 임황간군수 서주임관 사등급 8급봉(黃澗郡守, 敍奏任官 四等級 八級俸), 순종 융희1년 12월 31일 황간군수 임영동군수 서주임관 4등(임영동군수 서주임관 사등), 순종 융희 3년 기유(1909) 6월 30일 영동군수 승서주임관 3등 6급봉, 순종 융희4년 경술(1910) 7월 1일 영동군수 겸임 공립영동보통학교장(겸임 영동공립보통학교장), 임자(1912) 양 9월 24일 임평택군수(任平澤郡守), 갑인(1914) 2월 28일 홍성군수(洪城郡守), 임술(1922) 5월 홍성군수(洪城郡守) 면직.

공께서는 한일병합 후에도 두 고을 수령을 더하셨기에 쓰지 않으려다가 그래도 영동보통학교를 비롯하여 교육사업에 많이 힘쓰셨기에 몇 자 적었습니다.

공은 무인(1938)년 3월 21일 졸하시니 향년 69세이시다.

 

22) 임병익(林炳翼) : 순조29년 기축(1829) ~ 고종33 건양1년 병신(1896)

* 계열 : 서(㥠) - 연(堜) - 종유(宗儒) - 세량(世良) - 상태(象台) - 양호(養浩) - 악철(樂喆) - 승진(昇鎭) - 달수(達洙) - 계상(啓相)

                                         ㄴ담(墰)                                                          상로(象老)    명호(命浩)   시철(蓍喆)    이진(頤鎭)   기수(麒洙)    준상(準相)

                                                                                                                      상규(象奎)    지호(志浩)

* 자는 경모(敬謨)로 학생 계상의 자요, 생부는 덕산군수(德山郡守) 준상(準相)

* 공은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

* 고종8년 신미(1871) 8월 21일 헌릉참봉(獻陵參奉), 이어 사옹원, 봉사, 직장(司饔院, 奉事, 直長), 고종14년 정축(1877) 1월 8일 옥책안 집례로 아마(兒馬) 한필을 사급, 6월 20일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고종15년 무인(1878) 1월 19일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3월27일에 공릉령(恭陵令), 6월 30일 군위현감(軍威縣監)에 제수되어 부임하여 3년 가까히 재임하시며 선정(善政)을 펴셨고, 고종18년 신사(1881) 3월 21일 제천현감(堤川縣監)과 바꿔서 부임하여 또 이곳에서도 선정하시다가 고종20년 계미(1883) 3월 14일 영양현감(英陽縣監)과도 다시 바꿔서 부임하여 어떻게 남다른 선정을 펴셨는지 이곳에서도 3년을 재임하시다가 23년 병술 1월에 임기가 넘어 돌아오셨다. 그런데 그후 이곳 현민(縣民)들은 모두 공을 기려 선정비를 세웠으니 군위에는 주민입선정비(州民立善政碑)를 제천에는 강명인휼비(康明仁恤碑)를 영양에는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를 세워 지금도 이 세 고을에 세워져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공은 고종 건양1년 병신(1896) 12월 30일 졸하시니 향년 67세이시다.

 

23) 임병항(林炳恒) : 고종15년 무인(1878) ~

* 계열 : 晋(진) -  순(恂) - 축(埱) - 장유(長儒) - 치(治) - 기(夔) - 도현(道憲) - 태원(泰遠) - 처진(處鎭) - 철수(徹洙) - 한상(漢相)

                    복(復) - 협(悏) - 타(㙐)                                                                         제원(濟遠)

* 자는 성시(聖時)로 선서화인(善書畵人) 한상(漢相)의 2子

* 공은 어려서부터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의 수업(授業)을 받았고, 성장하여서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과거제(科擧制)는 폐지되었고, 차츰 실학(實學)과 여러 신학문(新學問)을 홍박(鴻博)하게 수학(修學)하였으며, 영국(英國)의 의회민주주의(議會民主主義)와 서구문명(西歐文明)을 오랜 기간 견문실답(見聞實踏)하는 등 이 나라의 개화(開化)된 지식인으로 성장하셨다.

고종 광무(光武) 5년 신축(1901) 음력 3월 14일 양력 5월 2일(이하 음력을 사용)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任命)되었다(당년 24세).

고종 광무6년 임인(1902) 6월 19일 장릉참봉에서 6품으로 올리고 노루가죽(獐皮) 한벌을 사급, 6월 22일 중추원의관 서주임관 6등(中樞院議官 敍奏任官六等)에 임명, 고종 광무9년 을사(1905) 5월 25일 6품에서 정3품으로 서임(敍任) (해주 주필당(駐蹕堂)을 수리하고 고칠 때 감독하신 공으로), 9월 14일 정3품 비서감승 서주임관 3등(秘書監丞 敍奏任官 三等) 임명, 15일 비서감승을 사임, 12월 29일 정3품 승종2품(陞從二品)(양주 풍양비각(豊壤碑閣)에 첨가비석을 세울 때의 공으로), 당년 29세로 우리 종문에 최년소 가선대부(最年少嘉善大夫)이셨다.

고종 광무10년 병오(1906) 11월 13일 종2품으로 진주군수급 2급봉(晋州郡守給二級俸, 1등군)에 임영(1등군은 전국 339개 부,군(府郡) 중 25개 군임).

"순종 융희1년 정미(1907) 10월 14일 진주군수 의원면직(依願免職), 공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이 나라의 지식인(知識人)이요, 개화의 선구자(開化의 先驅者)로서 나라의 자립과 독립을 지향하였으니 고종 광무10년 병오(1906) 양력 11월 17일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 대한협회의 전신)에서 ""교육식산(敎育殖産)에 대한  관리의 의무""를 연설하였고, 순종 융희3년 기유(1909) 4월 18일 대한협회 경주지회에서 한미흥업주식회사(韓美興業株式會社) 설립을 주도하여 부사장인 미국인  크라함, 한국인 이범도(李範燾 : 독립운동사에 나옴) 등과 국가의 빈부는 실업(實業)의 발달여하에 달려있다고 연설을 하며  주식(株式)을 모집하였으며, 5월 5일에는 당시 독립운동지로 지칭되던 대한 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 사장 영국인 베셀(한국명 배설)이 5월 1일 사망하니 공과 강윤희(姜玧熙) 등 10여명의 발기로 추도회(追悼會)를 동대문 밖 영도사(永道寺)에서 거행, 이 자리에서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과 公等이 추도연설을 하였다. 위 한미흥업주식 모집과 추도회의 상황은 일본 공사관 기록에 헌병기밀보고와 경시총감 기밀보고서에 나온다."

이 밖의 많은 활약에도 아랑곳 없이 한일합병의 국치는 1910년 경술 8월에 오고야 말았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내에 남아 개성에 크게 인삼을 재배하고 국내의 뜻있는 이들로부터 갹출하는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는 재정지원의 역할을 하다가 공년 68세에야 8.15해방을 맞았건만 해방후의 우리나라 정국은 좌우갈등에 정권욕에 혈안이 된 이승만을 등에 업은 친일파와 극우세력들에 의해 일제 점령기 이상으로 살벌한 민심은 미국이 아닌 중국이나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협력을 하지 않는 한 경우에 따라서는 일제점령기보다도 더 신변에 위협을 받기도 하는 정세하에 1949년 8월 22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 반민특위)까지 해산을 결의하는 독재폭력사회가 되니 공께서는 72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개성으로 피신하시니 하나뿐인 아들 천규(天圭)도 뒤따랐는데, 이듬해 6.25라는 민족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선의 철책이 생긴 이후 어느곳에서 졸하신지 얼마나 되는지 참으로 애닮은 민족의 비극이 아니리요, 약소국에 태어나신 한나라의 선구자요,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회상하며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장손이신 가형(家兄) 병응(炳應, 초명은 炳駿) 또한 일찍이 고종22년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 생원 340명 뽑는데서 7위로 합격하고 고종32(을유)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 제1회에 함태영(咸台榮), 이준(李儁) 선생 등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주사(主事)를 잠시 지내다가 사직하고 동우회(同友會) 간부로 회원과 군중 등 수만명이 합세하여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의 집을 방화(放火)하여 융희2년 무신(1908)에 평리원(平理院)에서 재판을 받아 지도(智島)에 10년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한일합병 후 풀려났으나 평생을 가시밭길을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