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무공(監務公) 임탁(林卓)
 

나주임씨 9世 : 호(號) 금은(錦隱), 감무공(監務公). 해남 감무,봉순대부(奉順大夫). 젊어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벼슬에 임하여도 청렴검소하였다.

일찍이 외직으로 해남감무(海南監務 從六品), 해주감목(海州監牧 從五品)등을 역임하고 내직으로 소윤(少尹 從四品)을 역임하다가 이성계 일파의 혁명으로 인하여 여흥왕(麗興王)과 윤왕(允王)이 시해되고 최영(崔塋), 변안렬(邊安烈), 정몽주(鄭夢周) 등 고려 충신들이 잇따라 참화를 당함에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이 고려의 종사를 슬퍼하며 원주 치악산(雉岳山)에서 단사(壇祀)를 모심에 임탁도 망복동지(罔僕同志)들과 더불어 참사하고 기울어가는 고려의 운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마침내 간성왕(杆城王)마저 찬탈(簒奪) 당하고 조선조가 건국함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괘관현(掛冠峴)에 올라 뜻을 밝히시며 관복을 걸고 통곡하면서 부조현(扶助峴)을 넘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이태조가 왕위에 올라 여러 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나주에 은거하고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승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標방錄)은 임 탁(林卓)을 십열(十烈)로 기록하였고 뒤에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과 경현사(景賢祠),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배향하였다. 고려통일대전 충신각에 배향.



 

감무공(諱 卓)께서 아호가 없으신데, 서울시 유도회에서 고려사 탐구차 회진을 방문하시어 감무공 묘소 참배중 이를 안타까이 생각하고 소속 학자들과 문중이 상의하여 감무공께서 나주 옛지명인 "금성에 은거하셨다"는 뜻으로 '금은(錦隱)'으로 추봉하여 고유제를 올렸다.
 

◆錦隱公(監務公 : 諱 卓) 作號 記

 檀紀4330年(西紀1997) 7月6日 서울시 儒道會(한가락모임)소속 學者 중관 최권홍 先生 이하 20 餘 名이 高麗史 探究 次 會津을 訪問하여 羅林 都先墓에 참배 중 監務公의 雅號가 없음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門中과 상의하여 '錦隱'(錦城에 은거 하시다)   이라 追封하고 300餘 字의 詩를 지어 告由祭를 올렸다. 이에 監務公의 613년 古宅을 門中의 결의(2005년1월)로 '금은당(錦隱堂)' 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2005年 6月15日

都有司 林鍾琓

 


◆봉순대부 감무공 임탁 묘갈



    奉順大夫海南監務(봉순대부해남감무)

    羅州林公諱卓之墓(나주임공휘탁지묘)



ㅡ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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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공( 歸來亭公) 경주부윤 임붕(林鵬)

 

⊙15世 귀래정공 휘(諱) 붕(鵬) 경주부윤 묘소⊙
 

◆가선대부 경주부윤(慶州府尹) 귀래정공 임붕 묘갈



       贈 貞夫人咸豊李氏之墓
      (증 정부인함풍이씨지묘)
      贈嘉善大夫禮曹參判同知義禁府
      (증가선대부예조참판동지의금부)
      湖守○○大夫慶州府尹林公之墓
      (호수○○대부경주부윤임공지묘)

 
ㅡ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ㅡ

나주임씨 15世 임붕(1486-1553) 선조님의 자(字)는  충거(冲擧), 호(號)는 귀래정(歸來亭)으로 중종 庚午年(1512년)에 생원(生員)을 하시고  申巳年(1521년)에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벼슬이 승지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고 광주목사 재임중 작고하신 분인데 문학과 덕망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
자세한 관력(官歷)은 한림(翰林), 함북병마평사(咸北兵馬評事), 경상도사(慶尙道事), 함경도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 옥당 교리(玉堂校理), 필선(弼善), 보덕(輔德), 집의(執義), 사간(司諫), 종부시정(宗溥寺正), 장악원정(掌樂院正), 좌우승지(左右承旨), 호∙예∙병∙형∙공 5조참의(戶∙禮∙兵∙刑∙工五曹叅議), 판결사(判決事), 전라∙충청병사(全羅∙忠淸兵使),경주부윤(慶州府尹),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고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반궁(泮宮 : 성균관)에 거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관학재생(館學諸生)이 공을 추대, 소두(疏頭)가 되어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를 구원하는 운동을 하였다. 

公을 기리기 위한 영모정(永慕亭)이 있고 귀래정 임붕 유허비(나주 다시 회진리 영모정 앞)가 있다.

 
  ▲영모정((永慕亭)

*15世 귀래정공 휘 붕(鵬)을 길이고 추모하기 위하여 아들 삼형제가 지은 정자*
ㅡ 전라남도 기념물 제112호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번지

 
귀래정 나주임공 붕 유허비(영모정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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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歸來亭)공 휘(諱) 붕(鵬) 사적(事蹟)


公의 휘(諱)는 붕(鵬)이요 자는 충거(冲擧)니 호는 귀래정(歸來亭)이시다. 성종 丙午(1486)八月六日에 낳으시고 중종 庚午(1512)에 생원을 하시고, 申巳(1521)에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 한원옥서(翰苑玉書) 은대(銀臺 :*承政院) 양호병마절도사와 계림(경주)부윤을 역임 하시고 명종조(1553)에 광주목사가 되어 계축(癸丑)六月에 졸하시니, 증가선대부 예조참판이다.

읍지》에 曰 임붕은 평(枰)의 아들이니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문과에 오르기 전에 生員으로써 半官(성균관)에 거할 때 己卯士禍를 만나 관학제생(館學諸生)이 공을 추대하여 소두가 되어 조정암광조를 힘써 구원하다 수차 불측한 지경에 빠질뻔 하였으나 그 때 사람들이 다 옳다고 찬양하였다. 그후 청환에 올라 관이 부윤이다.

정원일기》에 중종기해에 임붕으로써 강원도관찰사에 임명하였더니 대간들이 공을 기묘인이라고 하여 이윽고 체임시켰다고 기록되다.
공이 젊어서 함평군 휘 종의에게 수업을 하더니 대개 우후공 집에서 초동까지 十里가 가까워 매양 이른 새벽에 가서 수업을 할새 일일은 날이 아직 안 밝아 李公의 집 뜰 나무 밑에 의지하여 잠이 드니 李公 처의 꿈에 황룡이 그 나무 위에 사리어 있는지라 꿈을 깨어 노비를 시켜 가보게 하니 아직 잠이 깨지 안하였더라 그러므로 결친 할 뜻을 품어 드디어 딸과 결혼을 시켰더라 이상하의 전한 바로 창계공께서 이를 기하셨다.

정암년보》에 曰 그때에 태학생이 선생의 피첩됨을 듣고 앞을 다투어 궁궐에 나아간 분이 數千명이라 이약수와 신명인과 박광우 등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선생의 무죄를 변명했으나 문지기의 막는바 되어 분이나서 대궐 내정에 들어가 호곡하니 곡성이 대내에 사무쳤다. 上이 들으시고 명하여 하옥시키니 생원 임붕 등 수百인이 또 상소하여 선생과 이약수를 취옥할 것을 신구하고 향약제인이 또한 상소하고 부제학(副題學) 이사균과 대사헌 유운과 전한 정응 등을 모두 구하여 줄 것을 상소하였다.

기묘록》에 태학생 이약수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무죄함을 변명하여 서로 이끌고 대궐뜰에 들어가 곡성이 크게 떨치니 上이 곡성이 어디서 나느냐고 물으시니 정원이 사실로써 대답하니 전령하여 말하기를 유생들의 일로써 놀랠만한 일인즉 장중에 까지 난립함도 역시 죄가 되는 것이어늘 하물며 대궐뜰을 경솔히 들어와 통곡할 수 있으랴 하고 그 구금된 五六인을 또 구속하고 금군으로 하여금 이약수 윤언직 박세호 김수성 이옥등 오인을 쫓아내어 하옥시켰다.
이튿날 생원 임붕등이 또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를 소구하고 또 어제 유생들을 하옥시킴으로 신등이 가이 안연히 있을 수 없다하여 수백인이 궐문밖에서 命을 기다리기를 三日이 되더라. 上이 약수 등 석방을 명하고 그 疏에 답하여曰 광조등의 처음 뜻이 어찌 국사를 그르치게 했으랴만 나로 하여금 좋은 정치를 바랬으니 근래에 사람들이 과격한 일이 많기로 부득이 치죄했으니 대신들도 모두 국사를 인정코저 함이니 소인배가 군자를 배척함이 아니라고 말씀했다.
광조 등이 이미 귀양을 가고 여러 소인들이 뜻을 얻어 李沃과 윤세정과 이래등 三人이 상소하여 광조 淨 湜 自任 遵世 喜 薰等 八人을 죽이라고 청하니 서로 合하여 시론으로 말들이 극히 흉참 하더니 李沃은 처음 광조를 소구함으로써 하옥당한 사람으로 一年이 못되어 또 반듯이 죽이자고 하는데 참여하였으니 그 심술의 무상함이 이같더라.

여지승람》에 왈 홍치중에 사림 참의 임붕 外 모모 十一人이 다 문장들로서 허여하고 詩와 술로 벗을 삼어 매양 가절이 되면 금강에서 놀며 구경하기를 난정에 있던 고사와 같이 하였으니 일대 풍류들이 신선같이 여겼으며 금강십일계라 명목하여 박육봉우가 그 일을 기록하고 나한임 창이 또 詩를 지었고 호사하는 사람들이 그 초상을 그렸으니 그때에 모두 흠앙(

欽仰)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 詩에 曰 「십일인의 옛고향 벗들이 맹세하니 그 심사가 세한의 송죽과 같더라 이세상의 영달하고 초췌함이 뉘라서 선후하였던가 도화처럼 남만한 봄을 이루지 말라」하였고 十一人이 배를 타고 낙범정아래를 지나며 박연파에게 주는 시에 왈 「푸른 갈대와 섞은비에 술싣고 지내니 미녀들이 루에 비겼더라 호수위 연파에 옛처사가 풍류에 늙었도다」 하였더니 진섬호 경문시화에 왈 「금성에 십일인계가 있으니 다 대성씨 노인들이니」 왈 「임참의붕 정상사문손 김상사시 김상사두두 정공호 진상사이손 김공안복 진공삼손 세공 김공구 나공일손 등은 매양 양진가절에 모여 유상하기를 옛적 난정 고사와 같으니 그 이름을 금강계회도라 하더라 박육봉우가 그 일을 기록하고 나한림창이 詩를 써 부치니 한때의 승사더라 이무 그림을 그려 두었으나 전하지 못하고 자손이 간직한 것도 정유란에 불타니 그림과 기록이 다 없어지고 썩지 안한 것은 十一人성명과 시다. 계첩은 나공이 썼다.」 하고 《진세공집》에 전하고 있다 하나 역시 병란에 잃었다
.


 錦江11人 賢契와 錦江契會圖

  (금강11인 현계와 금강계회도)
 


'금강십일인계'는 나주임씨 15世 귀래정공(歸來亭公)께서 기묘사화 (己卯士禍)에 
성균관 진사 200여명의 소두(疏頭)로 趙靜菴선생의 피무(被誣)를 신변상소(伸辨
上疏)하였다가 왕이 장축지(杖逐之)함에 下鄕하여 錦江侍郞臺上에 結茅하여 
'存心養性講義命理' 8자를 壁上에 大書하고 良辰이면 모여 美景을 游償하며 
同舟로 遊泳하니 時人이 神仙契라 칭하고 계축(契軸)에 11人畵像을 圖(얼굴과
이름을 넣은 그림)하여 '錦江契會圖' 라 하였다.
나일손의 후예인 羅千洙씨가 수집한 재료에 김종섭씨가 번역한 시서가 
‘금강십일인계’ 서를 첨부하고 《나주임씨세승》에 있는 《여지승람》왈과
 김만영의 ‘금강십일인계’원문(후에 번역)을 보내드립니다.
금강십일인계’의 기록은 정유재란 병화로 영모정(永慕亭)에서 소실되었는데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연구할 과제입니다.

    ※자료제공 : 임채남 나주임씨 중앙화수회 부회장 편집 : 임점택 나주임씨 공식카페 운영자
         더 많은 자료는 다른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
     
     < 조선왕조실록 > 중종 14년 기묘(1519) > 11월17일  정미(丁未) 기사(記事)에 보면 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 임붕(林鵬) 등 2백 40여 인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억울함을 아뢰고 옥(獄)에 가겠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원(生員) 임붕(林鵬) 등이 또 상소하여 옥(獄)에서 대명(待命)하겠다고 청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의 일은 지극히 놀랍다. 죄주어야 하겠으나 죄주지 않으니 그리 알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귀래정공 휘 붕(鵬) 기사(記事) 내용은 다른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귀래정공의 생애와 활동 요약

    1486(성종 17)∼1553(명종 8)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 庚午年(1512년)에 생원(生員)을 하시고  申巳年(1521년)에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

    1519년 반궁(泮宮 : 성균관)에 거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관학재생(館學諸生)이 공을 추대, 소두(疏頭)가 되어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를 구원하는 운동을 하였다.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였다.
    유생들이 대궐 마당에 들어가 호곡(號哭)하자 왕은 주모자를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소를 올려 “유생들이 옥에 갇혔으니 신 등이 홀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 하고 생원으로 대학생 240여명을 이끌고 궐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3일째 되는 날 왕은 갇힌 자를 석방하고 상소에 답하며 타일러 보냈다.

    다음해 과거시험의 제목을 낼 때 시관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사류(士類: 조광조 등 기묘명현들)를 간사한 무리로 지칭함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어찌 차마 이 시에 글을 지으랴!” 하고 붓을 던지고 나와버렸다.
    申巳年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삼사[함북병마평사(咸北兵馬評事), 경상도사(慶尙道事), 함경도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를 두루 지내고 한림(翰林), 옥당 교리(玉堂校理), 필선(弼善), 보덕(輔德), 집의(執義), 사간(司諫), 종부시정(宗溥寺正), 장악원정(掌樂院正), 좌우승지(左右承旨), 호∙예∙병∙형∙공 5조참의(戶∙禮∙兵∙刑∙工五曹叅議), 판결사(判決事), 전라∙충청병사(全羅∙忠淸兵使),경주부윤(慶州府尹),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고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